논술 시험은 글쓰기 시험인가
흔히들 논술 시험은 글쓰기 시험이라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논술을 글쓰기 시험이라고만 말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논술 시험은 무엇을 평가할까요? 당연히 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을 평가할까요? 자주 들어 식상할지 모르지만 비판적으로 글을 읽는 능력(읽기), 창의적으로 문제를 설정하고 해결하는 능력(생각하기),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능력(쓰기)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시험임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논술은 읽고 생각하고 쓰는 과정 전체를 평가합니다. 쓰기도 중요한 한 항목이긴 하지만, 논술을 그냥 글쓰기 시험이라고만 하면 다른 주요 영역을 과소평가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논술 시험을 단순히 쓰기 시험으로 오해한 데서 실제로 몇 가지 문제가 초래되었습니다. 우선, 말로는 논술이 특정 교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국어 교사에게 논술 교육의 십자가를 다 지도록 한 것이 문제입니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는 국어과의 영역이고 논술도 쓰기이니 당연히 국어과에서 맡아야 한다는 논리이지요. 물론 국어 교사가 논술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논술이 쓰기이기 때문에 국어 교사가 맡아야 한다는 논리는 잘못된 것입니다. 읽기, 생각하기, 쓰기 전체에서 국어 교사가 나름의 역할을 해야 하며, 특히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전 교과에서 나누어 훈련하고 교육해야만 효과를 볼 수 있는 항목입니다.
논술을 단순히 쓰기 시험으로 생각하면서 더구나 단기간에 준비하다 보니 빚어진 더 큰 문제는 글을 번듯하게 꾸미고 구성하는 기술적 차원의 문제를 은연중에 더 중요시하면서, 단기간에 요령을 습득하는 방식으로 논술 준비를 해왔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보니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약화되고, 잘 쓴 글처럼 보이기 위해 ‘어떻게 쓸 것인가’에 잔머리를 굴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떻게 쓸 것인가’도 사실은 진지한 접근이 필요한데, 이를 표현과 구성의 문제로 축소시켜 테크닉 차원으로 단순하게 접근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어떻게’ 차원에서도 사실 논술은 특별한 테크닉이 필요한 시험이 아닙니다. 번뜩임보다는 치밀함이 우선입니다. 번뜩임이 없어도 치밀함은 신뢰를 주지만, 치밀함 없는 번뜩임은 공허한 환상과 같습니다. 따라서 번뜩이는 테크닉으로 무장된 여우보다는 둔한 듯 보이지만 치밀한 곰이 더 유리한 것이 논술 시험입니다.
그렇다면 쓰기는 논술에 당연히 포함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논술 시험이 어떤 시험인지 다시 정리해 보도록 합시다. 처음에 간략히 말했지만 하나하나 따져 보도록 하지요.
우선 논술 시험은 글 읽기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입니다. 논술 시험이 대학수학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라고 할 때, 가장 기본적인 능력은 바로 글 읽기 능력입니다. 책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는 학생이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과연 대학 생활을 어떻게 꾸릴 수 있을까요? 풍부한 교양과 전문성을 함께 기르는 바람직한 대학 생활은 꿈도 꾸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1997년 서울시내 12개 대학이 모여서 논술 시험에 대해서 함께 고민할 때에도 논술 시험을 일방적으로 글쓰기 시험으로 규정하지 않고 글 읽기 능력 및 글 쓰기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 대학 신입생 중 상당수는 책을 제대로 읽을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논술 시험에서 읽기 부분은 앞으로 더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국어 교사가 논술 교육에서 전문성을 더 발휘해야 할 곳도 바로 읽기 영역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논술 시험은 사고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입니다. 1997년 대학들의 모임에서도 창의적 사고는 주요 평가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더 부각되고 있습니다. 대학은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하는 곳입니다. 자료를 분석적으로 읽은 다음, 읽은 내용을 자기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어 토론, 논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걸러진 생각을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용하고 응용하면서 그 결과를 논리적인 글로 표현해야 합니다. 따라서 논리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대학수학을 위한 엔진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사고할 수 없으면 제대로 읽고 쓰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 때문에 논술 시험은 점점 더 사고력 시험으로서의 면모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으며,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자연스럽게 더 강화될 것입니다.
학생들은 흔히 글쓰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생각은 있지만 이를 표현하기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표현할 생각 자체가 옹골차지 못한 것이 더 흔한 경우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미봉책으로 그동안은 주제별로 배경지식을 정리해서 그것으로 내용을 메워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배경지식 자료집을 열심히 공부해서 남의 생각을 빌려오는 방식으로는 앞으로 논술에서 백전백패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이제 논술은 사고력 논술이기 때문입니다.
박정하 성균관대 학부대학 교수·EBS 논술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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