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동아일보 기자는 서울의 한 시니어클럽(노인일자리지원기관)에서 60대 정모 씨를 만났다. 정 씨는 지난해부터 지하철로 물품을 배송하는 실버택배업체에서 일하고 있지만 ‘쥐꼬리 급여’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요즘은 하루 배달 건수가 1, 2건에 그치는 데다 그나마 격일로 일하니 용돈벌이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 월 30만 원 못 버는 실버택배도 일자리 포함
실버택배는 기존 업계에 진입해 경쟁을 통해 돈을 버는 구조라는 점에서 ‘시장형 노인일자리’로 분류된다. 버스정류장 관리 등 봉사활동 성격이 짙은 공공형 노인일자리보다 급여 수준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목상으로는 일자리다운 일자리에 가까운 것이다.
실제 그럴까. 정 씨는 월 기본급 15만 원에 건당 5000원 정도의 수당을 받는다. 이 업체에서 일하는 고령층은 모두 15명. 이들이 한 달 동안 벌어들이는 전체 택배 수입은 200만 원이 조금 넘는다. 기본급을 합해도 한 명이 손에 쥐는 돈은 월평균 30만 원도 안 된다. 공공형 일자리의 한 달 급여 27만 원과 큰 차이가 없다.
지난해 정부가 주선한 일자리사업에 참여한 81만4000명 중 56만 명(69%)은 60세 이상이었다. 그만큼 공공부문 고용에서 고령층 비중은 절대적인 수준이다.
일자리 재정이 고령층에 집중된 셈이지만 이날 시니어클럽에서 만난 노인들은 하나같이 “정부가 일자리를 주는 건 고맙지만 취미생활 수준”이라고 했다. 시니어클럽이 운영하는 종이공예업체에서 카네이션 등 종이꽃을 만들어 판매하는 일을 하는 70대 정모 씨는 “그냥 동네 사람들 만나 얘기도 하고 소일거리로 하는 거지 실제 취업했다고 여기는 이는 별로 없다”고 했다. 정 씨도 정부 통계에선 신규 취업자로 잡힌다.
○ 일자리 통계 왜곡하는 노인일자리의 허상
서울의 한 ‘실버카페’에서 일하는 박모 씨(68)는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로 따고 교육도 받았지만 하루에 3, 4시간 정도 일하고 최저임금 수준만 받는다”고 했다. 올해 초 개업한 이 카페의 하루 매출은 10만 원도 채 되지 않지만 채용한 사람은 10명에 이른다. 실버카페가 1인당 근무시간을 줄여 일자리 수를 늘린 셈이다. 업무량이 많거나 육아 등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경우 본인 의사에 따라 근무시간을 조정하는 일자리 나누기와 달리 단순 업무를 억지로 나눠 취업자 수만 늘린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 같은 현상은 복지 관련 일자리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 자유한국당 추경호 의원실이 통계청 마이크로 데이터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올 5월 보건업 및 사회복지서비스업 분야의 60대 이상 취업자는 2년 전인 2017년 5월보다 14만8000명 증가했지만 주당 평균 취업시간은 2017년 5월 22.22시간에서 올해 5월 20.01시간으로 2시간 이상 감소했다. 공공행정서비스업 분야 역시 60대 이상 취업자가 2년 동안 약 9만7000명 증가했지만 주당 평균 취업시간은 17.84시간에서 16.33시간으로 줄었다.
추 의원은 “정부가 저임금, 단시간 노인일자리를 양산하며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며 “최근의 고용 개선 추세는 재정 투입을 통해 만들어낸 가짜 일자리 때문”이라고 했다. ○ “노인일자리, 고용 창출 아닌 사실상의 현금복지”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올해 노인일자리를 61만 개까지 늘리기로 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추가경정예산안에서는 노인일자리 3만 개를 추가하는 1000억 원 규모의 예산도 포함돼 있다. 5월 노인일자리 채용 인원의 84%에 이르는 42만2569명은 환경미화, 저소득층 도시락 배달 같은 공공형 일자리다.
반면 민간 분야와 연계한 인턴십이나 기업연계형 일자리 취업자는 1만 명도 되지 않는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재정 투입으로 만들어낸 일자리는 사실상의 현금복지일 뿐 지속가능한 고용이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