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복심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마침내 금 모으기 운동을 입에 올렸다. 물론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도 미국에 한일갈등을 설명하고 오는 길에 1907년 국채보상운동과 1997년 금 모으기 운동을 언급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때부터 이 정부 탄생까지 기획· 전략에 매진한 양정철의 발설은 다르다. 온라인 韓日戰은 시작됐다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까지 했었던 국민들이다. 우리 국민의 애국심을 얕보는 나라가 있다면 굉장히 낭패를 본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말은 틀리지 않는다. 물론 나라가 어려울 때는 고양이 손도 빌려야 한다. 하지만 정권 실세는 애국심이 아니라 해결책을 말해야 한다. IMF(국제통화기금) 위기도 정부가 경제를 잘못 운용해서 벌어진 것이었고, 그 정권은 결국 국민에 의해 교체됐다.
이미 온라인에선 애국시민과 보통시민 간의 한일전이 시작됐다. 방송에서 “반일감정 자극은 해답이 아니다”라고 멘트를 날린 방송앵커는 “의병이 나라를 구하지 않았으면 친일파가 구했느냐”는 공격을 받는다. 일본상품 불매운동하다 우리 점원 일자리 잃으면 어쩌느냐는 말도 못 꺼낼 분위기다.
현 정부 핵심부의 내심을 발신하는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이런 판국에 (일본 총리) 아베를 편드는 듯한 발언을 하는 분들은…동경으로 이사하든가”라고 말했듯, 외교적 해결책을 촉구하는 사람은 친일파 아니면 토착왜구로 몰릴 판이다(그럼 북한 김정은을 편드는 사람은 왜 평양으로 이사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反日감정으로 총선·대선까지?
정권 핵심부에선 일본의 보복 조치에 문재인 정부를 ‘레짐 체인지’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유시민이 “아베 총리는 한반도에 평화가 자리 잡고 통일로 가까이 가는 걸 원치 않는다”며 “정권 교체에 유리한 환경을 한국사회 내에 만들어주자는 계산도 아베 정권 일각에선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 걸 보면 안다.
그렇다고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 기조를 바꿀 리 없다. 일본이 그런 의도라면 반일감정을 자극해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것이 이 정부의 행동방정식에 더 들어맞는다. 양정철의 말도 내년 총선, 잘하면(아니 잘못하면) 다음 대선도 애국심과 반일(反日)마케팅으로 치를 수 있다는 계산이 엿보여 개운치 않다.
만일 정부가 일본과의 마찰이 격화될수록 총선, 대선에서 유리하다고 본다면 국민의 불행이다. 유일한 경쟁력으로 남은 반도체까지 흔들려 경제위기가 가속화되는 건 안타깝지만, 다 일본 탓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덕분에 소주성(소득주도성장) 실패 소리도 쑥 들어갈 것이다.
‘죽창가’를 들먹이는 청와대 참모, ‘이순신의 열두 척의 배’를 언급한 대통령은 전혀 든든하지 않다. 그건 백성의 대사이지 리더가 할 말이 아니다. 나랏님이 암만 잘못해도 나라에 기대지 말고(또는 기대하지 말고) 애국심으로 보위하라는 조선말 위정척사파의 주문 같다. 북한도 1990년대 경제 파탄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을 미 제국주의 탓으로 선전해 김씨 왕조체제를 지켜냈다.
“3억불에 강제동원 피해 감안됐다”
민정수석이, 대통령이, 그래선 안 될 이유는 또 있다. 2005년 8월 26일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에서 “1965년 청구권협정을 통해 일본으로 받은 무상 3억불은 개인재산권(보험, 예금 등),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 등 한국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임”이라고 결론을 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뿐 아니라 법률가, 외교관, 사학자, 시민단체, 피해자단체까지 최고의 전문가들이 13년 8개월에 걸친 한일회담 전 과정의 문서 156권, 3만5354쪽을 샅샅이 검토해 공개한 결과였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을 처음 포기한 것은 제2공화국의 장면 정부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노무현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1975년 보상이 불충분했다고 판단해 2007년 특별법을 만들어 7만여 명에게 6000여억 원의 지원금까지 지급한 건 잘한 일이다.
文, 2005년의 해결 왜 말하지 않나?
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강제징용과 다르다. 당시 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일본정부·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음”이라고 봤다. 사할린동포, 원폭피해자 문제도 한일 청구권협정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협상에 타결한 다음인 2016년 초 문 대통령은 “참여정부 한일회담문서 공개 때 저는 청와대에서 관여했다”면서 “한일회담 문서 공개에 의해 확인된 것은 위안부 문제는 회담 내내 단 한번도 논의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페이스북에 썼다. 그 말을 뒤집어보면,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선 한일회담에서 논의가 있었고 결론이 났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이 과정에 정부 측 위원으로 참여한 문 대통령이, 당시 국무총리이자 당연직 위원장이었던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일본으로부터 받은 3억불에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이 감안됐다”고 밝히지 않는 건 기이하다. 노무현 정부가 피해자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지원했다는 사실을 다시 알릴 좋은 기회인데도 ‘없었던 일’로 덮는 셈이다.
‘외교 적폐청산’ 후유증, 누가 책임지나
문 대통령이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협상으로 참여정부 이후 민관이 해온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과거 정부가 타결한 국가간의 협상 결과를 ‘외교 적폐 1순위’로 낙인찍고, 일본정부가 돈을 댄 ‘화해·치유재단’까지 해산해버린 건 또 다른 문제다. 노무현 정부처럼 과거 정부의 잘못을 대신 짊어질 아량도, 역량도 없다는 의미다.
2012년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을 썼다”며 ‘2005년의 과거 청산’을 뒤집은 김능환 대법관은 어떤 나라를 건국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과거 ‘양승태 대법원’과 박근혜 정부 간에 재판거래가 있었다는 공격에 2018년 10월 ‘김명수 대법원’이 적폐청산 식 결론을 내린 이유는 알 것 같다.
18일 대통령과 야당 대표들의 회동도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달라는 결론이라면, 한일 갈등 해결은 난망이다. 문 대통령은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의 결론에서 “이해찬 국무총리는 60년 이상 지속해 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여 국민통합을 도모하고…”의 결론을 다시 살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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