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의 포병부대를 찾아 포 실사격을 지시한 것은 9·19 남북 군사합의를 ‘사문화’하는 동시에 9주년(23일)을 맞은 연평도 포격 도발과 같은 상황을 재연할 수 있다는 경고로 해석된다. 25일 부산에서 막을 올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를 주관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포 사격이라는 방식으로 견제하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의 조건부 연장으로 한미일 안보 협력 틀이 유지된 상황에 대한 불만을 내비친 것이다.
○ 김정은, ‘임의의 시각에 전투임무 수행 준비’
김 위원장이 찾은 창린도에서 서해 NLL은 불과 10여 km 떨어져 있다. 북한은 이곳에 중대급 이상의 포병부대를 배치해 놓고 있다. 서해 최전방의 대남 포병기지인 셈이다. 창린도 일대는 9·19 군사합의로 설정된 ‘해상 완충구역(서해 NLL 일대 남북 약 135km 해역, 동해는 남북 약 80km 해역)에 포함된다. 이 구역에선 지난해 11월 1일부터 포 사격은 물론이고 야외기동훈련(해상 및 비행전술훈련 등)이 전면 금지됐다. 해안포의 포구·포신에는 덮개를 설치하고, 포문도 폐쇄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이곳을 전격 방문해 전투준비태세를 점검한 뒤 즉석에서 목표를 설정해 사격을 지시했다. 인근 해상에 돌출된 암석이나 수역을 향해 포를 쏘라고 명령을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군은 사격에 동원된 포의 종류와 발수, 사격 방향 등은 보안을 이유로 함구하고 있다.
다만 북한 매체가 공개한 김 위원장의 시찰 사진을 볼 때 76mm(사거리 약 12km) 또는 122mm 해안포(사거리 약 27km)를 사격한 것으로 보인다. 군 소식통은 “최단 시간에 해안포 수십 발을 쏴 표적에 대한 명중률을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싸움 준비와 전투력 강화가 곧 최대의 애국”이라며 “철저한 무기체계 점검과 기술관리를 통해 임의의 단위가 임의의 시각에도 전투임무 수행에 동원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 9·19 합의 보란 듯이 정면 위반
김 위원장의 이런 행보는 문 대통령과 맺은 9·19 군사합의를 보란 듯이 깨뜨렸다는 데 별 이견이 없다. 그동안 북한의 각종 도발에 대해 9·19 군사합의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던 국방부도 이날만큼은 ‘합의 위반’이라며 북한에 유감을 공식 표명했다. 군이 북한에 대해 9·19 합의 위반을 공개 비판한 것은 처음이다.
정부 당국자는 “금강산 남측 시설 철거 발표와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불참 통보에 이어 해안포 부대 현장 시찰 등을 통해 김 위원장이 비난 메시지를 직접 발신한 만큼 북한이 남북관계를 후순위로 돌린 것 같다”고 했다.
아울러 북한이 북-미 비핵화 협상 시한으로 정한 연말이 다가오자 김 위원장이 직접 나서 대남·대미 압박에 나섰다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판 이스칸데르 등 대남 신종 타격수단이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로는 미국이 꿈쩍하지 않자 연평도 포격 도발 9주년에 맞춰 남북 접경지역에서 국지적 긴장을 극대화하는 도발을 강행할 의도를 내비쳤다는 것. 군 소식통은 “북한이 서해 NLL과 서북도서 인근에 포격을 하거나 아군 함정을 위협하는 등 ‘벼랑끝 전술’을 재연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창린도 방문 시기도 의미심장하다. 군 소식통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23일이나 그 이전에 창린도를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연평도 포격 도발 9주년과 미 공군 B-52 전략폭격기의 한반도 인근 전개(22일)의 맞대응 조치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한일 간 막판 타결로 22일 지소미아가 조건부 연장된 것에 반발하는 한편 부산에서 개막한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문 대통령의 초대를 거부한 김 위원장이 노골적으로 재를 뿌린 것”이라고 말했다.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김정은이 아세안 정상들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작정하고 모욕 주겠다는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도 문 대통령이 (김정은에) 항의하지 않고 침묵한다면 정상 국가의 지도자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직접 항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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