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반 기업과 은행에 대한 규제 업무를 모두 해봤다는 관료를 만났다. 화제는 자연스레 두 집단의 차이가 무엇인지로 옮겨갔다. 결론을 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반 기업은 회사 이익이나 경영권에 조금이라도 해가 될 것 같으면 일단 끝까지 저항하는 데 반해, 금융회사들은 정부가 무슨 요구를 해도 항상 고분고분하더라는 것이었다. 오너 있는 기업과 주인 없는 은행의 차이가 또 이런 데서 갈리는구나 싶었다.
취업난에 마음이 급한 정부가 이번에도 만만한 은행들을 골라잡았다. 은행이 신규 채용을 얼마나 하는지, 고용 창출 기업에 대출을 얼마나 해주는지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은행이라면 직원 채용은 사람이 필요할 때, 대출은 돈 필요한 기업이 부실 위험이 적을 때 각각 알아서 하는 게 맞다. 이런 자율적인 경영 사안을 마치 초등학생 숙제 검사하듯 일일이 체크하겠다고 하니 은행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사실상 앞으로 필요하지도 않은 직원을 뽑고, 기업이 일자리만 유지하면 돈 떼먹힐 각오하고 대출을 내주라는 압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당국은 구구절절한 해명을 늘어놓고 있다. “일자리 창출 효과를 ‘측정’하는 것일 뿐 ‘평가’가 아니다” “순위를 공개하지 않으니 은행 줄 세우기가 아니다”고 했다. 그러자 금융권에선 “‘평가’와 ‘측정’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이냐” “선생님이 성적은 매기는데 부모님께만 알리지 않겠다는 말이냐”는 냉소가 터져 나왔다. 어떤 말로 취지를 좋게 포장해도 결국 개별 은행들의 일자리 성적표가 당국의 손에 들어가고, 앞으로 더 숫자를 올리라는 압박이 이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희한한 일이 발생한 배경에는 금융업에 대한 정부의 왜곡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금융회사를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동력은커녕, 국정과제를 뒷받침하는 공공기관이나 하청업체쯤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것도 좋게 말해서 ‘국정과제 지원’이지, 실제로는 국정 실패를 수습하고 떠안는 용도로 아무렇게나 쓰인다. 얼마 전 카드 수수료율 인하가 대표적이다. 최저임금 인상에 반발하는 자영업자를 달래기 위해 금융당국은 신용카드사의 팔을 비틀었다. 이번에는 무리한 소득주도성장과 이로 인한 고용대란의 책임을 난데없이 은행에 떠넘기려 하고 있다. 문제는 그 뒷감당이다. 은행들이 정부 압박에 필요 없이 많은 행원을 뽑고 부실 대출을 하다가 건전성이 악화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일자리는 성장과 투자, 혁신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이 정부는 마치 일자리를 기업의 옆구리를 찌르면 받을 수 있는 상납이나 흥정의 대상으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문제를 풀 수 없다. 지금처럼 “이익 좀 냈으니 일자리 창출로 보답하라”는 식으로 압박하면 오히려 기업의 의욕이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일자리도 줄어들 것이다.
일자리는 기업이 필요할 때 늘린다. 정부가 할 일은 막대한 세금을 퍼부어 일회성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업 활동에 족쇄가 되는 규제를 풀어주는 것이다. 기업이 직원 채용을 사회공헌 삼아 하는 나라는 이 세상에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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