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이라는 변칙적 모임을 통해 예산안을 강행 처리한 것도 어이없지만 그 혼란 와중에 집권당 대표를 포함한 실세 의원들의 지역구 예산 챙기기는 제3세계 폭동 현장에서 상점 TV를 들고 나오는 이들의 흥분된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
자유한국당이 어깃장을 놓아 할 수 없이 4+1 모임을 했다고 강변하는데, 설령 그랬어도 예산안 논의 속기록은 남겼어야 하지 않는가. 한국당이 속기록 남기는 것도 방해했단 말인가. 정의당을 비롯한 군소정당들도 분명 헌법기관인데 정치적 반대급부를 얻기 위해 집권당 들러리를 자임하는 행태는 ‘정의’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더 한심스러운 모습은 한국당의 김재원 국회 예결위원장이다. 현장에선 “세금 도둑”이라고 고함치더니 실제론 지역구 실리는 다 챙겼다. 상점 약탈을 막겠다고 나선 자경대장이 가장 큰 TV를 들고 나온 셈이다. 김 위원장의 그런 행태를 묵인한 채로는 황교안 대표가 아무리 농성을 하고 새 원내대표가 혁신을 외친들 감동이 없을 것이다.
가장 걱정스러운 대목은 정권이 원하는 대로 슈퍼 팽창 예산을 안겨주는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경제 관료들이다. 역대 경제 관료들은 재정건전성을 신앙처럼 여겼다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올 5월 “국가채무비율 40%의 근거가 뭐냐”고 되물은 이래 경제 관료들의 사전에서 재정건전성은 사라져버렸다. 군사정권 시절 국방비를 깎은 예산실장에게 권총을 들이대도 버텼다는 일화 등은 전설로만 남게 됐다. 국방부 통일부 등에 이어 경제 관료들마저 국가의 기둥으로서 본분을 포기해버린 것이다.
물론 장관, 국장도 생활인이고 직장인이다. 자리 보전과 다음 인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자리들은 한명 한명이 국가의 인스티튜션이고 마지막 보루다. 그런 국가의 기둥들이 어쩌다 본분을 포기한채 정권의 시녀처럼 돼버린 것일까. 답을 풀 실마리를 유재수 감찰 무마와 울산시장 하명 수사 의혹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사건은 이 정권 실세들의 특질을 보여준다. 영화 ‘친구’를 떠올리면 된다. 즉 의리와 보복이다. 유재수와 송철호에 대한 ‘배려’는 이 정권 출범 후 노골적인 캠코더 인사들에서 돋보였던 ‘의리’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10월 조국 법무부 장관이 사퇴했을 때 여권 핵심에서는 그 후에도 한동안 윤석열을 사퇴시켜야 한다는 주장들이 계속 나왔었다. 당시엔 감정적 복수 차원으로 보는 해석이 많았지만 실제론 검찰이 유재수와 울산시장 사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하든 막아보려는 절박한 움직임이었을 수 있다.
요즘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이 검찰에 대한 특검론까지 들고나올 만큼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에서 보스를 보호하려는 2인자가 연상된다는 반응이 많다.
정상적 조직이 조폭류와 다른 점은 윗선의 지시가 절차와 명분, 법률에 어긋나면 각 이행단계에서 브레이크가 걸린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 이 정부와 주요 기관들에서 그런 게 실종된 이유는 바로 노골적인 보복의 영향이다.
조국 사태 당시 동양대 총장이 조 후보 측에 불리한 발언을 했을 때 시중에선 농담 비슷하게 저러다 찍히겠다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이 정부 교육부처럼 설마 바로 그 직후 중인환시리에 대규모로 치고 들어갈 거라고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현 정부를 수사했던 검사들에 대한 불이익, 김경수 사건 재판장에 대한 온갖 압박, 현 정권에 불리한 자료가 유출될 때마다 자행된 색출 작업…. 과거 독재정권들은 정당성이 취약하다는 콤플렉스 때문인지 보복을 할 때 감추는 시늉이라도 했다. 하지만 이 정권은 거리낌이 없다. 공식 응징이 어려우면 친문이라는 다중이 인터넷을 무기로 나선다. 10일 전해 들은 요즘 중앙부처 분위기다.
“고위 공무원들 사이에 조금이라도 밉보이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두려움이 팽배하다. 핸드폰 임의제출 공포 때문에 서로 문자도 잘 안 보낸다. 시키면 군말 없이 하되 누가 뭘 시켰는지 일일이 다 기록해 놓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국가를 위해 직을 걸고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고 관철하려고 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 정권 실세들이 두루 등장하는 텔레그램 내용 등은 그들에겐 선악의 판단 기준이 법과 양심이 아니라 피아 구분이었음을 보여준다. 목적 달성만이 중요할 뿐 과정 같은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충성과 의리로 뭉친 그들이 2년 반 동안 ‘개혁 비협조자들’을 응징하고 ‘적폐’에 대해 가차없는 보복의 칼날을 휘두르는 동안,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들어 온 국가의 기둥들이 속절없이 안에서부터 무너져 온 것이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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