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김원 광장 건축환경연구소 대표(76)와 처음으로 눈인사를 나눴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싶었다. 한데 오랫동안 쓴 글을 모은 ‘꿈을 그리는 건축가’(태학사·광장) 출간을 계기로 27일 마주앉은 노신사는 딴사람 같았다. 여전히 채 갈무리되지 않은 혈기가 흘러나온다고나 할까. 말은 둥글어도 뜻이 지닌 예봉은 감춰지지 않았다.
김 대표는 1980년대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국악당을 비롯한 5대 문화시설 건축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했다. 1990년대에는 ‘동강 살리기’의 일선에 섰으며 최근에도 자연과 문화자원을 보존하는 내셔널트러스트(국민신탁)운동을 벌이고 있다. 서촌에 있는 이상의 집터가 팔린다는 소식을 듣고 매입 보존을 시작한 것도 김 대표다. 그는 “서울 사대문 안은 난개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오래된 지론”이라고 했다.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이 터를 잡고 궁을 지을 당시 서울의 도시계획을 보세요. 멋들어진 산을 배경으로 육조거리를 만든 것만 봐도 공간과 디자인에 대한 감각이 대단했던 거지요. 산업화 와중에서라도 만약 ‘사대문 안에는 5층 이상 못 짓는다’ ‘모든 골목에서 산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물길은 살린다’고 옛 도시의 형성 논리를 지켜줬다면 세계적으로 서울보다 아름다운 도시를 찾기 어려웠을 거예요.”
책 ‘꿈을 그리는…’에는 “(필수 도로만 남기고) 서울의 사대문 안을 몽땅 차 없는 거리로 만드는 꿈”에 관한 글이 있다. 흥인지문(동대문)에서 돈의문(서대문) 자리까지는 불과 약 4.2km. 종로를 왕복 2차로만 남기고, 녹지와 보행자의 길을 만들자는 주장이다.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수십 년 전 서울시민에겐 오늘날 서울 모습 역시 꽤 비현실적이지 않을까.
인터뷰하던 서울 종로구 통인동 ‘(시인) 이상의 집’ 앞으로는 수많은 행인과 자동차가 오갔다. 김 대표가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저 길 아래, 지금도 물이 흘러요. 수성동 계곡에서 시작해 지금 동아미디어센터 앞에서 청계천과 합류하는 개천이 흐르던 곳입니다. 옛 지도를 보면 서울은 물길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어요. 인왕산부터 청계천까지만 해도 수십 개지요. 그를 건너는 작은 다리들이 얼마나 아름다웠겠어요.”
그 물길은 모두 도로가 됐다. 토지 보상도 필요 없으니 복개만 하면 자동차가 다닐 수 있었다. 김 대표는 “물길을 절반만 살렸어도 좋았을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자동차 의존도를 줄이고 걸을 권리를 되돌려줘야 한다”고 했다.
김 대표는 광화문시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새로운 광화문광장을 만드는 의견수렴을 돕고 있다. 보행자 중심으로 광장을 대폭 넓히는 광장 재구조화는 최근 제동이 걸려 기약이 없는 상태다. 그는 “시장의 토목 치적 쌓기 차원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그가 이사장을 지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속칭 ‘알박기’도 한다. 개발 이익을 누리려는 게 아니라 보존하기 위해서다. 민통선 안쪽 철새도래지 땅도 샀다. 김 대표는 ‘섬 내셔널트러스트’도 설립했다. 그는 “섬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주민들도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고 했다.
책에는 LG그룹 창업자인 구인회 회장(1907∼1969)에 얽힌 일화도 담겼다. 김 대표가 김수근건축연구소에서 일하던 1966년, 구 회장이 은퇴 뒤 살 집의 설계를 맡겼다. 구 회장은 김 대표와 함께 냉면을 먹으면서 “(집이) 40평이면 우리 부부에게 충분하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김 대표는 작은 주택을 그렸지만 김수근은 “그분은 그렇게 살 수 없는 분”이라며 응접실과 회의실, 접견실 등이 딸린 저택을 지었다. 김 대표는 “내가 고집을 부려 구 회장님의 생각을 현실화시켰다면 지금도 ‘구인회 회장이 말년에 살던 소박한 집’으로 회자될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작지만 알뜰하게 설계해 달라고 찾아오셨던 거지요. 사실 11, 13평짜리 서민 아파트야말로 한국 최고의 건축가가 맡아 설계해야 합니다.”
최근 별세한 구 회장의 장남 구자경 회장이 부산사범부속초교 교사로 일할 때 김 대표는 그 학교 학생이었다. 구자경 회장은 은퇴 뒤 옛 제자들을 모아 가끔 밥을 사며 옛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누이동생은 김 대표와 같은 반 친구였다.
“그 친구가 명절이 지났는데도 헌 운동화를 신었더라고요. 물으니 ‘앞쪽에 구멍이 나야 새 신발을 사 준다’고 해요. 그때도 엄청난 부잣집이었는데 말이지요.”
수명이 다한 브라운관의 대체품을 구하지 못해 불이 꺼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다다익선’은 백남준과 김 대표의 공동작업이다. 김 대표가 백남준과 협의하며 구조를 짰다. 1003개의 모니터를 지탱하기 위해 기초를 암반까지 내렸다. 모니터 수명이 다했을 때의 처치에 대해 백남준은 “몰라, 상관없지”라고 했다고.
“백 선생은 늘 ‘인생은 길고, 예술은 짧다’고 했어요. 지금 굳이 옛 화면을 재생하려 애쓸 필요 없어요. 일단 꺼 놓고, 구부러지는 디스플레이가 상용화된 뒤 브라운관에 맞게 붙여도 됩니다.”
김 대표는 최근 국회의사당 개보수 자문위원장도 맡았다. 김수근건축연구소에 있을 당시 여의도 개발계획 실무를 맡아 의사당 터를 잡은 이가 그였다.
“원래 여의도 내에 있던 양말산(羊馬山)에 기대 물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였어요. 장기적으로는 비슷하게라도 배산임수를 복원해야 합니다. 당장은 리모델링을 통해 의원들이 싸우고 싶은 생각이 덜 나는 공간을 만들었으면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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