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수난시대[횡설수설/이진영]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2일 03시 00분


독일과 프랑스 의사들이 알몸 시위에 나섰다. 프랑스 의사가 ‘총알받이’라고 쓴 붕대만 두른 알몸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린 것이 시작이다. 코로나19 환자는 몰려드는데 보호 장비가 턱없이 부족해 감염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음을 누드로 표현한 것이다. 독일 의사들도 “환자 상처를 꿰매야 하는 내가 왜 마스크를 꿰매고 있어야 하느냐”며 장비와 인력 부족을 호소하는 누드 사진을 온라인에 줄줄이 공개하고 있다.

▷사스와 메르스로 단련된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한동안 전염병 걱정 없이 살던 서구는 초유의 코로나19 사태로 허둥대고 있다. 영국은 의사 가운마저 부족해지자 의사들끼리 가운을 돌려 입으라는 지침을 만들었다. 유럽에선 선방하고 있는 독일조차도 병원에서 소독제와 마스크 도난 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장비난이 심각하다. 미국 간호사들은 최근 환자를 돌보다 감염돼 숨진 동료들의 사진을 들고 백악관 앞에서 보호 장비 지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러시아에선 48시간 연속 근무로 지친 의료진이 집단 사표를 낸다고 한다. 이탈리아는 마스크나 위생장갑 없이 진료하다 감염돼 숨진 의사가 최소 150명이다.

▷의사에게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환자를 돌보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옛날에는 흑사병이 돌 때 도망가는 의사가 많아 베네치아는 1382년 의사들의 도주를 금지하는 법까지 만들었다. 1793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황열병이 창궐했을 때도 도시에서 탈출하는 의사들이 줄을 이었다. 미국의학협회는 1847년 의사윤리강령을 제정해 감염병이 발생하면 의사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환자를 돌봐야 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20세기 에이즈 발병 초기엔 환자 치료를 거부하는 의사가 적지 않았다. 2003년 사스 당시 중국 다음으로 많은 사망자(44명)가 발생한 캐나다에선 많은 의료진이 출근을 거부하기도 했다.

▷대한의사협회 의사윤리강령에는 ‘의사의 안전보다 환자 목숨이 먼저’라는 비장한 내용은 없다. 그럼에도 코로나19 최전선에 선 3700여 명의 국내 의료진은 반창고투성이 얼굴로 1일까지 1만774명을 치료해 9072명을 완치시켰다. 많은 사람이 의료진을 응원하는 ‘덕분에 챌린지’에 동참하는 이유다. 하지만 의료진의 헌신만을 일방적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은 브리핑 때마다 “의료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을 떠올려 달라”며 개인 위생수칙 준수와 거리 두기를 호소한다. 의료진 감염자 수도 지난달 초 240명을 넘어섰다. 동료들의 죽음으로 시위에 나선 미국 간호사의 말처럼 의료진은 ‘영웅’이지 ‘순교자’가 아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코로나19#의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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