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훈 국가정보원장이 11월 25일부터 부산에서 열리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참석할 가능성이 있다고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했다. 그러나 이 보고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가 담긴 보고에 불과하다. 유엔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다시 시작하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났으니 꽉 막힌 남북관계에도 통로가 생기지 않을까 해서 나온 것이다. 소망적 사고라도 할 수 있게 해준 전조(前兆)로는 북한이 10월 15일 평양에서 열기로 한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H조의 ‘대한민국 대 북한’의 경기를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통보한 것이 꼽힌다. 그러나 북한은 이 통보를 9월 15일 대한축구협회가 아니라 이 예선전을 주관하는 아시아축구연맹(AFC) 측에 했다.
국정원장의 소망적 사고 근거는?
AFC는 예선전을 치르는 국가는 3개월 전 시간과 장소를 확정해야 한다고 규정해놓았다. 이 때문에 북한도 3개월 전 이미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오후 5시 30분 한국과 경기를 한다고 AFC 측에 통보했다. 9월 15일 통보는 이를 재확인해준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갔다. 북한 조선중앙방송은 한국 방송사를 대표해 KBS와 평양 예선전을 중계하기로 합의했다. 빅 이벤트인 만큼 중계료는 다른 예선전보다 4.5배가량 많았다고 한다.
이번에 평양에서 치르는 월드컵 예선전은 우리에게 중요한 경기다. 10회 연속 월드컵 출전이라는 중요한 목표가 있는 만큼, 이 목표 달성에 실패하면 대한민국은 다시 40년을 노력해야 한다.
북한도 다급하기는 마찬가지다.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진 후 치르는 경기에서 ‘주체의 나라’가 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평양에는 지난해 9월 19일 문 대통령이 “남쪽 대통령 문재인입니다”라고 연설했던, 훨씬 큰 5·1경기장(10만 명 수용)이 있는데도 북한이 그 절반(5만 명)밖에 수용하지 못하는 김일성경기장을 경기장으로 삼은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다. 2011년 북한은 ‘김일성’ 이름이 걸린 이 경기장에서 ‘철천지 원수’인 일본을 격파한 바 있다.
대한민국은 평양 예선전에 한국 축구의 명예를, 북한은 북한 정권의 명예를 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남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평양에서 정식으로 맞붙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무조건 빅 이벤트가 된다. 그만큼 양측 모두 이겨야 한다. 북한은 남북 직접 대화가 안 되는 현실을 활용, 심리전을 포함해 ‘이기기 위한’ 다양한 수를 쓰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붉은악마’의 방북을 교묘히 막아버린 것이다.
아시아 축구경기에서 붉은악마는 일본의 ‘울트라 닛폰’과 함께 가장 조직적이고 강렬한 응원을 하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 다른 나라들은 붉은악마와 울트라 닛폰 두 조직의 방문을 부담스러워한다. 북한도 예외일 수 없다.
2011년 11월 15일 북한은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당시 평양에서 일본 축구대표팀을 맞았다. 북한은 대집단체조 ‘아리랑’ 공연으로 유명한 5·1경기장이 아닌 김일성경기장을 지정했다. 일본에서는 울트라 닛폰의 방북에 지대한 관심이 쏠렸다. 북한은 교묘한 방법으로 이를 막아버렸다. 비자 발급 조건으로 초청장 제시를 요구해 울트라 닛폰이 아닌 일반 일본인들만 북한에 올 수 있게 한 것.
그런데 식전 행사로 ‘기미가요(君が代)’가 연주되자 김일성경기장을 가득 채운 5만 북한 관중이 엄청난 야유를 퍼부었다. ‘아리랑’을 통해 널리 알려진 카드 섹션과 파도 타기 등으로 열렬하게 응원도 했다. 500명도 안 되는 일본 응원단은 존재감을 상실했다. 이 경기에서 북한은 박남철 선수의 헤더로 1-0 승리했다.
울트라 닛폰 잠재운 북한 응원
당시 기사를 보면 경기 후 일본 응원단은 하나같이 “저렇게 큰 소리를 낼 줄 몰랐다. 그동안 해온 우리식 응원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일부는 공포감을 느꼈다고도 했다. 똑같은 상황을 북한은 한국 응원단을 상대로도 만들 수 있다. 북한은 AFC만 상대함으로써 이미 붉은악마의 방북을 막아버렸다. 일반 한국인만 올 수 있게 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방북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를 깨는 기회로 만들려 한다.
북한은 외국인 관광 모객을 두 통로로 하고 있다. 중국 베이징의 고려여행사와 스웨덴의 코리아컨설트를 통해서는 외국인을 모객하고, 한국인 관광객은 금강산국제여행사가 모집한다. 금강산국제여행사는 대행사를 통해 평양 예선전을 관람할 한국인을 모집해왔는데, 이들은 초청장이 있어야 북한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해놓았다. 관광업계에서는 알음알음으로 진행된 평양 예선전 모객이 성황리에 마무리됐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북한은 사전에 모집한 이들을 검토해 이상이 없으면 초청장을 발급할 테니, 붉은악마 성향을 가진 이들의 방북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한국인은 한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북한에 갈 수 있는데, 북한은 ‘문재인 정부의 노선’도 이용하려 한다. 북한이 평양 예선전 직전에 초청장을 받은 이에 한해 단체비자를 내주겠다고 하면 문재인 정부는 성향상 이들에게 방북 허가를 바로 내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입북한 한국인을 교묘하게 관리할 것이다. 첫째가 인원 통제인데, 이는 북한 측 사정 때문에 하는 것이다. 북한은 월드컵 참관단의 경우 반드시 북한 민항기에 탑승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 베이징이나 선양 등에서 2~3일에 1편꼴로 평양에 가는 고려항공은 170석 이하 중형기다. 두 공항에는 한계가 있으니 갑작스럽게 많은 전세기를 받아줄 수도 없다. 그런데 다른 승객들도 있기 때문에 전세기를 투입하더라도 평양에 보낼 수 있는 월드컵 참관단은 하루 200명을 넘기 어렵다.
깜깜이 전술 시작한 북한
평양의 호텔 객실 수는 500여 실로 어림된다. 따라서 2인 1실로 숙박하게 해도 하루 1000명 이상의 외국인은 받을 수 없다. 그런데 상당수 객실을 기존 손님들이 사용 중이니, 북한이 받을 수 있는 월드컵 참관단은 500명을 넘기기 어렵다. 북한은 이틀에 걸쳐 이들을 공수해 2박 3일 혹은 3박 4일간 머물게 하면서 월드컵 예선전은 물론이고, ‘아리랑’ 후속인 ‘빛나는 조국’과 묘향산 관광 등을 순차적으로 실행하게 한다. 이러한 관광객이 김일성경기장에서 외치는 “대~한민국”은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북한은 평양 예선전을 국내외 정치용으로도 활용하려 하는데, 이를 위한 대전제가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의 승리다. 그래서 ‘깜깜이’ 전술을 추가한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경기 직전 중국을 거쳐 평양에 들어가기로 했는데, 평양 예선전 전날 평양으로 가는 북한과 중국의 모든 민항기는 9월 말 현재 만석이다. 이는 북한 관광 상품을 판매하는 여행사들이 미리 예약한 탓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대한축구협회는 다급해진다. 방법은 북한이 전세기 등을 띄우는 통 큰 배려를 해주는 것인데, 이 자체가 정치 행사가 된다.
전세기 요금은 정기편보다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다. 북한은 KBS와 직접 협상하지 않고 중개인을 통해 방송료를 계약했는데, 방송팀도 9월 말 현재 북한행 항공편을 확보하지 못했다. 북한은 한국 방송단을 ‘한 번 흔들어놓은 후’ 입북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러한 깜깜이 전술들이 쌓이면 한국은 경기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 남북관계를 유화적으로 가져가고자 국가 차원의 의지까지 작동한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이러한 점에서 평양 예선전은 1990년 남북통일축구대회와 비슷하다.
평양 예선전은 소망 대 소망의 대결장이다. 북한은 이 경기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강력한 목표가 있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와 김 위원장의 방문을 고려해야 하니 조금은 고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파울루 벤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선수들은 다르다. 자칫 10회 연속 월드컵 출전이 무산되는 계기가 만들어지면 이들은 평생 씻을 수 없는 멍에를 져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승리한다면 한반도 정치를 승리로 만든 팀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평양 예선전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대 한반도 정치의 싸움이다. 정치가 생물이듯 공도 둥글기 때문에 경기 결과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많은 것이 불확실한 가운데 한국인 관광객과 벤투호는 평양으로 떠난다. 그러나 항공기편은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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