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정부의 수반인 캐리 람 행정장관의 고압적 태도가 송환법 반대 시위를 더욱 키웠다고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17일 보도했다.
지난 9일 100만 명이었던 시위 군중은 불과 일주일 만에 200만 명으로 불었다. 이는 람 장관이 고압적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며, 결국 시위대는 람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 10일 기자회견 “송환법 강행한다” : 처음으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것은 지난 9일이었다. 이날 홍콩 시민 103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 이후 람 장관은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당초 예정대로 송환법을 강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홍콩정청은 신원을 알 수 없는 무리들이 24시간 내에 문제의 법률을 폐기하지 않으면 람 행정장관은 물론 법무장관과 그 가족들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고 밝혔다.
홍콩 법무부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 15일 기자회견 “경찰이 법을 집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 : 16일 대규모 시위를 앞두고 람 장관은 15일 오후 4시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송환법 무기한 연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법안 연기보다 법안 추진의 필요성에 초점을 맞췄다. 람 장관은 “일단 연기하지만 개정안을 완전히 철회할 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더 나아가 시위대와 경찰 간 충돌에 대해서도 “책임 있는 정부로서 우리는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한다”며 시위대에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홍콩 시민들에게 사과할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경찰이 법을 집행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당연한 일이다. 이는 경찰관의 사명”이라고 말해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 16일 기자회견 사과문 발표했으나… : 람 장관의 이 같은 발언에 시위 참여 인원은 더욱 늘었다. 16일 시위에 홍콩 시민 200만 명이 참석해 송환법 폐지와 람 장관의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시위 인원이 200만에 달하자 람 장관은 결국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람 장관은 이날 8시30분 사과 성명을 냈다.
람 장관은 “당국이 추진한 미흡한 일로 홍콩 사회에 많은 갈등과 논쟁을 야기하고, 많은 시민들을 실망시키고 괴롭게 했다는 점을 인정한다”며 “진심 어리고 겸손한 자세로 비판을 수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람 장관의 사과에도 홍콩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시위에 참여한 트로이 로(24)는 SCMP와 인터뷰에서 “그가 왜 지금 사과하는지 모르겠다. 만약 정말 사과하고 싶었다면 어제 했어야 했다. 그는 즉각 사퇴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때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에 빗대 홍콩의 ‘철의 여인’으로 불리던 람 장관이 홍콩 시민의 공적으로 전락한 것이다.
◇ 첫 여성 행정장관으로 입지전적 인물 : 첫 여성 행정장관이 된 람 장관은 가난한 노동자 가정서 태어나 정부 수반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1957년 홍콩 서민 거주지인 완차이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책상이 없어 숙제를 침대 위에서 해야 할 정도로 넉넉지 못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1등을 하지 못하면 울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대 재학시절에는 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했으나 대학 졸업 후 23세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관계에 진출했다.
그는 2007년 도널드 창 행정부에서 개발국장 자리에 오른 후, 시민의 반대에도 영국 통치의 상징물인 퀸스피어 철거를 강행해 ‘터프한 싸움꾼’이란 명성을 얻었다.
◇ 우산혁명 때 베이징에 눈에 띄어 : 그가 베이징에 눈에 띈 것은 2014년 우산 혁명 때였다. 당시 정무사장(총리)이던 람 장관은 학생 대표들과 공개 토론을 하면서 강경 입장을 고수했다. 이는 중국 지도부를 흐뭇하게 했고, 중국 지도부는 그를 차기 행정장관으로 밀 것을 내정했다. 그는 서슴지 않고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로 시진핑 주석을 꼽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 주민의 말보다 베이징 권부의 말에 더 귀기울였던 그는 ‘철의 여인’에서 ‘공공의 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시위대가 람 장관의 하야를 주장하고 있어 행정장관 직도 풍전등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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