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병원에 시인이 살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한전병원은 도봉구 쌍문동에 위치한 종합병원이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떠올리며 찾아간 쌍문동은 드라마 속 분위기를 찾기는 어려웠다.
대신 대형병원과 아파트촌, 잘 정비된 천변이 있었다. 옛 정취는 없었지만, 확 트인 전경이 시원하고 멀리 보이는 북한산 인수봉이 아름다웠다. 시인이자 한전병원 흉부외과 의사인 김응수 박사를 만났다.
김응수 박사는 바람의 승부사다. 그가 읊조린 말대로 스치는 바람을 잡으려는 무모함일지 몰라도, 그런 그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전병원 흉부외과 진료실에서 만난 김응수 박사는 흰 의사가운이 잘 어울렸다. 한전병원 병원장까지 지낸 약력의 소유자이기에 다소 무겁고 진지한 느낌의 인물이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예상외로 순수한 소년의 웃음으로 반갑게 에디터를 맞아주었다.
흉부외과 연작시 1.
오랜 심장병으로 회복의 기미가 없는 이가 김응수 박사를 찾아와 도봉산을 등산할 수 있게 해주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노라 했다. 사실상 승산이 없는 수술이었지만, 김응수 박사는 수술을 원하는 환자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환자는 도봉산을 오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김 박사는 그렇게 그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고 있다.
“미국 드라마를 보는데 주인공 의사가 환자를 살리지 못하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그 의사는 쓸쓸히 집에 돌아와 캐비닛을 열었는데, 그곳에 살리지 못한 환자들의 이름이 주욱 붙어있었습니다. 너무나도 공감되는 장면이었죠.”
숙명을 떠안고 사는 것. 그 쓸쓸함이 의사 김응수를 시인 김응수로 만들었을까? 의사 김응수라는 명의를 만나 새 생명을 얻은 수많은 이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김 박사는 끝내 살리지 못한 이들에 대한 쓸쓸함을 곱씹으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이 항상 묻는 질문이 있어요. 왜 많은 진료과 중에 흉부외과를 선택했느냐고요. 갈수록 흉부외과를 지원하는 레지던트들이 눈에 보이게 줄고 있죠. 예전에는 심장수술이 꽤 많았지만, 요새는 예방의학의 발달로 심장 관련 수술도 정말 많이 줄었어요. 그리고 흉부외과를 찾는 환자는 한 번 나으면 완치가 되기 때문에 사실상 수익이 되지 않는 과에요. 제가 레지던트를 할 때 주변에서 신경과를 지원하라고 권했었는데, 그래도 저는 흉부외과를 고집했죠.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데, 제가 아내한테 이런 말을 했다고 하네요. 흉부외과는 내과나 다른 과처럼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지루하게 가타부타하지 않고, 사느냐 죽느냐를 단번에 결정할 수 있어서 흉부외과를 선택했다고요.”
김응수 박사에겐 승부사의 기질이 있다. 더불어 가망이 없더라도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각오가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환자의 수술을 거부하지 않고,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보이면 그 운명에 맞서는 의사가 바로 김응수 박사다.
바람은 잡히지 않았다 너무 말라 손가락이 길었던 어린 시절 신열 속에서도 거칫한 뺨을 스치는 바람을 잡으러 달리기도 했다
- 김응수 ‘봉화奉化’ 中
흉부외과 연작시 2. 아내를 위한 노래
김응수 박사가 응급학과전문의 자격을 따려 할 때 아내가 반대했다고 한다. 김 박사가 아내에게 왜 그러냐고 따져 묻자, 아내는 “당신 이름의 ‘응’자도 지겨운데, 응급학과전문의의 ‘응’자 까지 보기는 더더욱 싫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누구보다도 바쁘게 사는 남편이 응급전문의까지 따게 되면 더 자주 볼 수 없음을 걱정한 이야기였다. 그런 아내의 속마음을 아는 김 박사는 아내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로맨티스트였다.
“흉부외과 의사였던 큰아버지의 영향으로 의대에 진학했어요. 하지만 의대가 적성이 맞지 않아서 사법고시를 준비하려는 찰나에, 이대 영문과에 다니던 친누나가 같은 과 새내기 후배를 소개시켜 주었어요. 긴 생머리를 찰랑이던 그녀는 새내기치고 꽤 세련된 모습이었어요. 저는 초면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조병화 시인의 ‘초상’이란 시의 첫 구절을 읊어주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그 시의 마지막 연을 받아주었어요.”
- 김응수 -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때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 처음 본 이대 영문과 세련된 새내기-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 조병화 ‘초상’ 中
그날 이후 김 박사와 세련된 이대 새내기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7년의 열애 끝에 두 사람은 화촉을 밝히게 되었다. 김 박사가 의대로 돌아와 흉부외과 전문의가 된 것에는 아내가 큰 역할을 했다. 그때 세련된 이대 새내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명의(名醫) 한 명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김 박사의 아내야말로 종작없는 청춘의 심장을 개심(開心)하게 만든 또 한 명의 명의(名醫)가 아닐지.
“저와 결혼하기 전 아내가 많은 고민을 했어요. 종잡을 수 없는 저의 엉뚱함 때문이었지요. 결혼하고 나서 갑자기 산골에 틀어박히거나 아프리카 오지에 봉사한답시고 떠나버리면 어쩌나 하고요. 하지만 결혼 후에는 아내의 걱정과는 달리, 저는 속세의 한가운데에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웃음).”
너무 구워지고 태워진 것일까 당신과 보낸 시간에 길들지 못해 여름 감기보다 드물게 사랑이 오네 가을처럼 잡을 새 없이 지나가는 사랑을 보네 추운 늦가을 아침에
- 김응수 ‘당신이 사랑했던 남자처럼 / 아내와 나·여덟’ 中
흉부외과 연작시 3. 시인의 노래
김응수 박사는 한전병원 병원장을 역임한 후, 현재는 한전병원 흉부외과 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김 박사는 흉부외과 전문의가된 것에 만족하고, 한전병원 같은 공기업 병원에 들어와 공익적인 환경에서 의사 생활을 펼칠 수 있어서 만족한다고 한다.
“대한민국 의료계의 관행에 대해서 항상 아쉬움이 남아요. 병원에 사고 환자들이 들어오기만 하면 전신 CT(컴퓨터단층촬영)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전신 CT 한 번 하면 방사선량이 굉장한데요. 방사선에 노출된 분들이 훗날 갑상선에 이상이 생길 것이라고 짐작했고, 최근 갑상선 질환이 급속도로 늘고 있음을 보면서 많이 안타깝더라고요. 지나친 상업주의에 물든 병원 세태가 문제입니다.”
김 박사는 의사가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하는 직업이 된 것은 전문성을 내세워 세분화된 것만 익히고 인문학적 소양을 겸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병원장 시절, 이상적인 한전병원을 꿈꿨던 김 박사는 그 토대를 문학적인 토양에서 찾으려 노력했다. 인문학의 정신처럼 의학의 정신에도 사람이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시인의 집 / 김응수
나의 시가 햇밥처럼 따뜻하다면 온기로 시를 보듬을 수 있다면 부스러기 모아 고슬고슬한 밥 지으면 좋겠네 밥이면 호사스러울까 대궁으로 밥알 듬성한 죽 한 그릇이라도 만들면 좋겠네
시는, 나의 시는 죽도, 밥도 되지 못하네 등 따숩고 배부를 때 시는 무얼까 간혹 보푸라기마냥 느껍게 이는 시는 어디에 숨어 있다 배고픈 짐승마냥 기웃대는 것일까
물컹한 물메기 껍질 같은 남도의 바닷가 먹장구름에 가려진 포도를 접어드니 언뜻 내미는 ‘시인의 집’ 지상에서 모락모락 기억날 듯 말 듯한 시가, 시인이 꿈지럭거리며 여기에 살아 있었네 운전대를 돌려 전봇대를 걷어 젖히네 어, 텅 빈 든바다의 가로막
‘낚∼시인의 집’
“사람의 질병을 고치는 것이 시를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어요. 특히 흉부외과처럼 결과가 확실한 경우에는 더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살리지 못한 분들, 떠나가신 분들이 계속 생각납니다. 그런 가운데 시를 쓰면서 이 사회가 좀 더 순수해지고 배려가 있고 솔직해지기를 꿈꾸게 되었어요. 시인은 의사처럼 면허가 없고 좋아서 하는 것이니, 은퇴와 면허 반납 없이 언제까지고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김 박사는 겸손하게 자신을 ‘삼류 시인’이라 칭했지만, 아름다운 병원과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와 같은 의사가 언제까지고 은퇴 없는 시인의사로 남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의사가 있는 병원은 온갖 질병에 감염되어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백신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펜(메스)과 꽃(시)을 양손에 든 의사시인 모두에게 지복(至福)이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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