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에 대해 대법원은 어제 징역 3년 6개월을 확정해 선고했다. 여권의 유력한 대권주자 반열에 올랐던 안 전 지사 사건은 지난해 초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미투 폭로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건 중 하나였다. 이 사건은 1심 무죄, 2심 유죄로 판결이 엇갈렸다. 1심, 2심 모두 성관계 사실 등의 인정에는 차이가 없었으나 2심이 직장 내 권력관계에 의한 성폭행의 경우 더 단호한 법적 평가를 내렸고 대법원은 2심 판결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그동안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행’의 핵심 요소인 위력의 범위를 엄격히 해석해왔다. 안 전 지사 사건에서는 수행비서가 성폭행을 당한 후 안 전 지사와 동행해 와인바에 간 점, 지인과의 대화에서 안 전 지사를 적극 지지하는 대화를 한 점 등이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이번 대법원 판결은 위력의 형식적 개념에 집착하지 않고 직장 내 권력관계가 남녀 관계를 어떻게 미묘하게 뒤틀 수 있는지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우리나라의 성폭행 처벌은 ‘No means no(노는 노를 뜻한다)’라는 원칙을 따르고 있다. 피해자가 명시적인 거부 의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가해자를 성폭행으로 처벌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독일 등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Yes means yes(예스는 예스를 뜻한다)’라는 원칙에 따라 명시적 동의 의사가 있지 않으면 성폭행으로 간주해 처벌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명시적 거부 의사를 따지는 데서 명시적 동의 의사를 따지는 쪽으로 ‘성인지 감수성’을 높여가야 한다.
현실의 ‘위력’은 공기처럼 눈에 잘 띄지 않은 채 작동할 수 있다. 이런 위력은 감수성을 높이지 않으면 감지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성폭행을 당하고도 피해를 보상받기는커녕 오히려 ‘꽃뱀’ 취급을 받는 억울한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이번 판결이 직장 내의 권력관계에 의한 성폭행만이 아니라 피해자를 길들여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로 만들어 가하는, 이른바 그루밍 성폭행 전반에 대해 미투 시대에 걸맞은 성숙한 성 윤리를 확립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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