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92년 오스카 역사의 새 章… ‘기생’ 벗어나 ‘자생’으로 이룬 쾌거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1일 00시 00분


봉준호 감독(51)이 영화 ‘기생충’으로 세계 영화사를 새로 썼다. 기생충은 어제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 영예인 작품상에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까지 4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아카데미 역사상 ‘자막 달린(비영어권)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것은 처음으로 세계 대중문화 중심지에서 한국의 콘텐츠 파워를 과시한 쾌거다.

한국 영화는 그동안 유럽의 3대 영화제에서는 10여 차례 수상한 적이 있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벽은 높았다. 비영어권인 아시아계 작가가 각본상을 받은 것도 기생충이 처음이다. 감독상은 대만 출신 리안 감독이 두 차례 수상한 적이 있지만 할리우드 자본과 배우들로 찍은 할리우드 영화였다. 기생충은 지난해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는데 칸과 아카데미에서 최고상을 동시에 수상한 것도 1956년 미국 델버트 만 감독의 ‘마티’ 이후 64년 만이며 역대 두 번째 기록이다.

봉 감독은 그동안 사회적인 메시지를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는 영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내 평단의 호평과 흥행을 아우르는 감독으로 주목받아 왔다. 기생충도 모든 나라가 안고 있는 빈부격차 문제를 신랄한 풍자와 어두운 스릴러로 영상화해 세계 곳곳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해외 영화제 57곳의 초청을 받아 주요 영화상 55개를 수확했다.

봉 감독은 “내 앞에는 수많은 영화 선배님들이 계시다”며 기생충의 성공 배경에는 101년 한국 영화의 전통이 있음을 강조했다. 한때 할리우드 영화에 의지해 연명해온 한국 영화산업이 자생력을 갖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보호막이 사라진 후였다. 1988년 외화 직배의 빗장이 풀렸을 때, 2006년 스크린쿼터(한국 영화 의무상영 일수) 축소를 결정했을 때 ‘한국 영화의 죽음’ ‘문화주권의 상실’이라는 격렬한 반발이 나왔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과 도전 끝에 전성기를 맞았다. 임권택 이창동 김기덕 박찬욱 감독이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잇달아 낭보를 전해왔고 국내 상영관의 한국 영화 점유율은 2000년 35.1%에서 지난해에는 51%로 뛰었다.

아시아는 물론이고 문화 상품 수출국이던 미국과 유럽에서도 이제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 케이팝을 즐겨 듣고 본다. 정부의 보호 정책 덕분이 아니다.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내버려뒀더니 놀라운 자생력을 갖고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것이 한국문화의 저력이다. 봉 감독은 “가장 모험적인 시도를 했을 때,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필됐을 때 가장 큰 파괴력을 가진다”고 했다. 창의력과 도전 정신으로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키워 가는 시도가 이어지길 기대한다.
#아카데미 시상식#기생충#봉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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