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의’ 피어오르는 시대적 상황 속 ‘국제인’으로서 백남준 조명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전시 작품 26년 만에 최초로 재현
눈여겨 볼 ‘귀한’ 작품은 ‘몽골텐트’, ‘로봇-K456’, ‘머리를 위한 명상’
‘혁신적’, ‘선구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국제적 예술가 백남준(1932~2006)의 회고전이 17일(현지시간)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열린다. 테이트모던과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이 공동기획한 전시는 백남준의 작품 200여 점을 소개하는 대규모 전시다. 영국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장소로 꼽히는 테이트모던(지난해 관객 590만 명)에서 한국 출신의 예술가가 집중 조명되는 것은 처음이다. 전시를 담당한 이숙경 박사·테이트 시니어 큐레이터(50)에게 직접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200여 점이 넘는 방대한 규모다. 어떤 구성으로 백남준을 조명했는가?
“전시의 기본적인 목적은 백남준의 탈국가, 초국가적이면서 미래지향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초기 작업부터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12개의 방으로 구성했다. 백남준의 아이디어나 그가 협업을 많이 했던 예술가들의 관계 등으로 분류됐다. 관객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방에는 TV부처(1974)와 TV정원(1974/2002)이 전시된다. 푸른 이파리 사이에 텔레비전이 놓인 대형 설치작품인 ‘TV정원’은 자연과 기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을 예견한 작품이다. 그 다음에는 백남준의 첫 개인전인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의 일부를 복원한 공간이 뒤를 잇는다. 당시 선보였던 작품 상당수가 모여 한 방을 차지하고 있다. 위성 중계 프로젝트를 다룬 방도 있다. 백남준이 협업한 예술가인 샬롯 무어만,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를 다룬 방도 마련됐다.”
―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에서 선보이고 대상을 받은 ‘시스틴 채플’도 26년 만에 처음으로 재현했다.
“재현하는 과정에 1년이 걸렸다. 베니스에서 백남준의 작업 보조를 했고, 지금은 백남준의 유작을 관리하는 큐레이터인 존 허프만의 조언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백남준이 당시 작업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 사진과 증언에 의존해야 했다고 한다.) 시스틴 채플을 전시한 공간에는 빔 프로젝터 36개가 설치됐다. 프로젝터들이 벽면뿐 아니라 천정에도 영상을 투사하기 때문에, 구조물의 설계나 프로젝터의 위치 등 고려할 사항이 많았다. 1993년 당시에는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의 양쪽 날개 건물 중 하나를 완전히 채웠는데, 그곳은 층고가 굉장히 높다. 그래서 프로젝터 40개를 사용했는데, 갤러리 공간은 그보다 층고가 낮아 36개를 사용했다. 프로젝터 기술이 진화를 거듭해, 당시에는 크고 무거운 것을 설치하느라 고생했는데 이번엔 작고 가벼운 프로젝터를 사용했다. 시각적 이미지를 표출하는 데 집중해 현대적 기계를 사용했다.
― 프로젝터 얘기가 흥미로운데, 백남준이 늘 기계를 사용했기 때문에 기술적 문제가 항상 발생한다. CRT 모니터를 구하는 데에도 애를 먹진 않았는지?
”작품마다 그에 맞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만약 작품의 외형적인, 조각적인 측면이 중요하다면 화면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로 그대로 전시했다. 반면 영상의 내용이 중요한 작품이라면, 작가가 남긴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큐레이터의 선택이 필요했다. 다만 백남준도 작업마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기술적 접근을 했기에, 큐레이터로서 기술적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접근하려 했다.“
― 눈여겨봐야 할 작품을 꼽는다면?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전시됐던 작품인 ‘몽골텐트’가 정말 보기 힘든 작품이다. 독일 뮌스터뮤지엄에서 대여해 온 작품으로, 몽골과 유라시아, 시베리아에 관심이 많았던 백남준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한민족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접점을 알고 싶어 했다. 작품은 1980년대 말 몽고족이 쓰는 텐트를 직접 구매해 집처럼 꾸민 형태다. 내부에 TV부처와 자신의 얼굴을 브론즈 가면으로 만든 것을 안에 놓았다.
아주 어렵게 빌려온 작품으로는 ‘로봇-K456’(1964)을 꼽을 수 있다. 백남준이 1980년대 로봇 형태의 작품을 자주 제작했는데, 이 작품은 최초의 로봇이다. 후기에는 영상을 보여주는 형태의 로봇이 많았는데, 이 때는 백남준의 ‘대리인’처럼, 그가 조종하면 움직이면서 퍼포먼스를 하는 로봇이었다. 또 하나는 1961년 백남준이 독일 비스바덴에서 했던 퍼포먼스 ‘머리를 위한 명상(Zen for Head)’의 결과물이다. 백남준이 당시 플럭서스 페스티벌에 참가해서 자신의 손과 머리카락에 물감을 묻히고 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 흔적을 그대로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이다.“
―2010년 테이트리버풀에서도 ‘백남준’ 전시를 연 것으로 알고 있다.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흔적을 훑어보며 백남준에 대해 느낀 바가 있다면?
”수년간 연구를 해왔지만 더욱 절실히 느낀 건 지금 시대에 백남준의 작품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는 점이다. 디지털환경이 변화해 대중문화도 국가의 경계가 없어지고, 이 문화를 통해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국가에서 국가주의적인 경향이 등장하는 우려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기술과 통신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많은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본 백남준의 철학을 이 시점에서 다시 돌아보게 됐다. 정말 서로 ‘접속’돼 있는 세계가 도래했다. 백남준은 당시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미래를 당시 미리 봤던 것 같다.“
― 그런 점에서 ‘협업’을 조명한 것이 의미심장하다.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와의 협력에 상당한 공간을 할애했다.
”백남준은 한국인으로 태어나 일본으로 망명하고, 그 뒤 독일로 유학을 가고 나서 나중엔 미국에서도 활동했다. 그러면서 네 국가들의 미술 커뮤니티와 항상 밀접한 연계를 갖고 활동했다. 예술가로서 아시아와 유럽, 미주의 커뮤니티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 셈이다. 이는 결국 백남준이 국가간의 경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예술을 통해 보여줬음을 시사한다. 테이트모던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미술관이다. 지난해부터는 영국의 모든 장소 중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은 곳이기도 하다. 또 미술관 관객의 절반은 국제적 방문객으로, 이곳은 영국인만의 것이 아닌 세계적인 장소다. 여기서 백남준을 이 시점에 조명하는 이유도 결국은 그가 ‘탈국가’와 ‘연결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세계가 격변하고 있는 지금 같은 시기에 백남준이 중요한 회고의 접점이 되길 바란다.“
영국 테이트모던의 ‘백남준’전은 내년 2월 9일까지 열린다. 전시는 이숙경 박사·테이트 시니어 큐레이터와 루돌프 프릴링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SFMOMA) 미디어 큐레이터, 발렌티나 라바글리아(테이트), 안드레아 니체-크루프(SFMOMA)가 큐레이트 했다. 테이트모던과 SFMOMA가 공동 기획해 미국, 네덜란드, 싱가포르에서 순회전이 열릴 예정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