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春分)이 되면 겨우내 길었던 밤의 길이가 낮과 같아지고, 이날을 기점으로 낮이 점차 길어져 계절은 완연한 봄으로 접어든다. 3월 21일을 전후해 태양은 황도를 따라 움직이다가 적도면과 만나는 춘분점에 이르게 되는데, 올해는 이달 20일 12시 50분에 춘분이 들었다. 농촌에서는 24절기에 따라 춘분에 봄갈이(春耕)를 해 청명(淸明)에 씨를 뿌릴 준비를 하고, 곡우(穀雨)에 내릴 비를 위해 농수로를 손본다. 농경사회에서 춘분은 농번기의 시작을 알리는 기준점이었다.
계절 변화를 나타내는 24절기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것이어서 달의 모양으로 날짜를 셈하는 음력과는 잘 맞지 않는다. 그래서 농업을 주로 했던 동아시아에서는 태음력 대신 24절기와 결합된 음력인 태음태양력을 사용했다. 우리나라는 1896년 을미개혁으로 양력인 그레고리력이 공식 달력으로 채용될 때까지 태음태양력을 사용했다. 서양의 그레고리력이 그 이전 1600년 이상을 이어져 오던 율리우스력을 대체하여 표준달력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도 ‘춘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때는 농사가 아니라 기독교 전례(典禮)가 문제였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리는 부활 축제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때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325년에는 니케아공의회를 열어 교회 제도와 교리를 정비하기까지 했다. 공의회에서는 그동안 논쟁이 됐던 부활절 날짜를 ‘춘분이 지난 후 첫 번째 보름달이 뜬 후 첫 번째 일요일’로 결정했다. 따라서 춘분은 부활절 날짜를 정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됐다. 당시 로마제국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6년에 제정한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공의회가 열린 325년의 춘분은 3월 21일이었다.
율리우스력에서 1년의 길이는 천문학적 1년과 비교하면 128년에 1일의 편차가 발생한다. 이 편차가 1200년 정도 쌓인다면 10일의 오차가 생긴다. 1582년에 태양이 춘분점에 도달한 시점, 즉 실제 춘분은 율리우스력으로는 3월 11일이었으나 당시 교회는 여전히 3월 21일을 춘분으로 간주해 부활절을 계산했다.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기 위하여 로마 교회의 수장이었던 그레고리우스 13세 교황은 1582년 10월 4일의 다음 날을 10월 15일로 정해 열흘을 삭제하고, 3300년에 1일의 오차밖에 나지 않도록 윤년을 조정한 새로운 역법을 제정했다. 16세기가 끝나기 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그레고리력을 도입했고, 오늘날에는 동방정교회와 이슬람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레고리력이 표준 달력으로 사용되고 있다.
금년은 춘분 후 첫 보름이 4월 7일이므로 일요일인 4월 12일이 부활절이다. 교회에서는 다가올 부활 축제를 맞이하느라 희망과 활력이 넘쳐나야 할 텐데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대부분의 행사와 모임이 중단되는 바람에 무거운 분위기로 스산하기까지 하다. 이 어두운 역병이 하루빨리 물러가서 다가오는 부활절에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종교와 상관없이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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