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출신 강정훈 씨(45·당시 부장)는 2015년 12월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는 사내에서 남들보다 2년 앞서 특진을 거듭할 정도로 잘나가던 스포츠 마케팅 전문가로 꼽혔다. 대학 농구선수 출신으로 미국에서 스포츠 마케팅을 공부한 뒤 삼성전자에서 2005년부터 만 10년 동안 토리노, 베이징, 밴쿠버, 런던, 소치로 이어진 5번의 올림픽을 경험했다. 당시 평창 겨울올림픽이 3년 앞으로 다가오면서 스포츠 마케팅에 전문적으로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대기업 타이틀’을 버려보기로 했다.
믿고 따르던 선배의 퇴사 소식에 밑에서 일하던 후배 4명도 곧장 나왔다. 당시 대리였던 권도현 씨(34)는 “‘삼성맨’이던 아버지가 충격을 받아 두 달간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할 정도로 주변에서 만류가 많았지만 결국 내 꿈 하나 믿고 나왔다”고 했다. 이듬해 1월에는 제일기획에서 함께 올림픽 마케팅 업무를 했던 멤버들까지 파트너로 합류했다. 한국의 유일한 올림픽 공식 스폰서인 삼성그룹 출신으로서 친정에서 함께 쌓아온 노하우를 평창을 시작으로 제대로 한 번 펼쳐보자는 포부로 회사 이름도 ‘WAGTI’(We Are Greater Than I·우리는 나보다 위대하다)로 지었다.
신생 회사였지만 시작은 생각보다 쉬웠다. 국내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직접 협상해 본 경험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 사실상 삼성 외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강 씨는 “IOC 마케팅 계약 규정이 굉장히 까다로운데 해도 되는 것과 해선 안 되는 것을 구분해내는 게 노하우”라고 했다. 기업 브랜드나 제품을 홍보할 때 상업성이 지나치다고 판단될 경우 IOC가 제재를 가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기업이 시행착오를 겪는다. 기업 홍보관을 멋지게 짓고도 허락받지 못한 곳에 기업 로고를 붙이면 운영이 불가능하다. 제품군을 분류하는 기준도 까다롭다. 예를 들어 올림픽 무선 분야 파트너인 삼성전자는 스마트폰을 홍보할 수는 있지만 ‘보는 몰입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영상 분야 파트너인 파나소닉으로부터 제재를 받을 수 있다.
이런 현장 경험을 앞세운 덕에 이들은 회사를 차리자마자 KT의 평창 올림픽 마케팅 컨설팅을 맡은 데 이어 노스페이스와도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순탄할 줄로만 알았던 평창 올림픽으로 향하는 길은 예상치 못한 국정농단 사태에 발목이 잡혔다. 강 씨는 “평창 올림픽 후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나빠지면서 대부분의 기업이 투자를 줄였고, 마케팅 규모가 예상치보다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고 했다. 일본 도쿄 올림픽이 2년 전부터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과 상반되는 상황이었다. 지난해 초엔 북핵 이슈까지 터지면서 IOC의 글로벌 스폰서 중 한 곳과 진행하던 계약마저 엎어지는 등 타격이 컸다.
팀원들은 한국 땅에서 언제 또 열릴지 모를 올림픽을 이대로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절박한 마음으로 라이선스 상품에 도전했다. 역대 겨울올림픽마다 가장 성공적이었던 기념품이 장갑인 점에 착안했다. 기왕이면 한국에만 있는 문화를 알리고 싶어 당시 인기를 끌던 ‘핑거하트’(엄지와 검지를 겹쳐 하트 모양을 만드는 손동작)를 활용했다. 전문 디자이너 없이 직원들이 직접 흰 목장갑을 끼고 도안을 그려가며 디자인했다. 역시 삼성전자 출신으로 창업 멤버인 정동민 씨(38)는 “핑거하트를 적용한 첫 장갑이라 디자인 특허도 냈다”고 했다.
이들은 그렇게 완성한 ‘평창 핑거하트 장갑’을 평창 올림픽 공식 라이선스 제품 판매회사인 롯데에 납품하는 데 성공했다. 기발한 디자인에 엑소와 방탄소년단 등 인기 연예인들도 자발적으로 인증샷을 올렸다. 그 덕분에 중국에선 원래 가격(1만5000원)에 웃돈이 붙어 팔릴 정도로 인기다. 강 씨는 “통상 기념품은 올림픽 개막 이후에 80∼90%가 팔린다”며 “올림픽 공식 스토어와 공항 등에서 3월 중순까지 판매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들은 “삼성에서 탄탄하게 쌓은 기본기를 토대로 한국의 스포츠·문화 마케팅 저변을 넓히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미국의 IMG, GMR나 일본 덴쓰 같은 글로벌 에이전시가 한국에서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는 설명이다. WAGTI는 이를 위해 도쿄 여름올림픽과 베이징 겨울올림픽의 문도 두드리고 있다. 더 나아가 일본 아식스와 독일 아디다스 같은, 올림픽을 계기로 성장한 전문 스포츠웨어 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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