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욱 대검찰청 차장이 지난주 검찰 내부망에 올린 글의 한 대목이다. 편지지 4장에 손으로 직접 쓴 글의 제목은 ‘사직 인사. 작별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법연수원 4기수 후배인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검찰총장 후보자로 지명된 지 3일 만에 용퇴 의사를 밝혔다. 두 사람은 다른 고검장 2명과 함께 법무부 검찰총장후보추천위원회가 선정한 경쟁 후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윤 후보자를 지명하기 하루 전까지도 정치권에선 봉 차장 지명 가능성이 많이 거론됐다. 욕심을 낼 만했다. 연수원 기수를 중시하는 검찰에서 윤 후보자가 제친 선배 21명 중 직책상 최선임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일말의 서운함도 원망도 배어 있지 않다.
오히려 글의 초점은 검찰 조직의 동요를 가라앉히는 쪽에 맞춰져 있다. 그는 ‘초임 검사 시절 선배들의 가르침’이라며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훗날 후배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처신하자”고 했다. 퇴임의 당위와 명분을 강조한 것이다. 또 글 말미에서 신임 총장 체제의 발전을 기원했다. “노련한 사공이 험한 바다를 헤쳐 나가듯, 세찬 변화와 개혁의 물결 속에서 ‘공정하고 바른 국민의 검찰’로 새롭게 발돋움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의 글에는 5일 만에 댓글이 600개 가까이 달렸다. 앞서 이 정도로 댓글이 많이 몰린 퇴임사는 4년 전 김경수 전 고검장의 것뿐이다. 대부분 후배 검사들이 썼다. 일부는 수사관, 실무관이 달았다. 댓글 전체에서 공통적으로 많이 언급된 단어는 ‘온화’ ‘미소’ ‘인자’ ‘배려’ ‘헌신’ ‘품격’이다. 이런 열광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은 검사 재직 26년간 올곧은 자세를 유지했기 때문이리라. 한 검사는 댓글에서 “스스로에게 엄격하시면서 주위 사람들에게는 인자하고 배려심 깊은 모습에 늘 존경해 왔습니다. 업무에는 철저하시면서 업무 외에는 편한 선배이셨습니다”라고 했다.
어쩌면 그런 반듯하고 부드러운 성품이 신임 검찰총장 선정 과정에서 약점으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그가 총장 후보에 포함된 직후 청와대와 검찰 일각에선 ‘난세의 검찰’을 리드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됐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적폐청산 수사 및 공소 유지를 마무리하고, 논란이 극심한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도입 문제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시각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찰의 지난 20년은 특별수사부가 주도했지만, 2020년대는 형사부 전성시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국민 다수의 관심이 부패 권력 등 거악 척결보다 일반 사건 수사의 공정성 여부에 집중될 테니 그 준비를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수사권 조정도 거기에 맞춰야 한다는 자세였다. 그는 법무, 인권 등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은 기획통이다. 결국 문 대통령은 특수통 윤 후보자를 선택했고, 봉 차장은 훌훌 털어버리고 검찰을 떠난다. 퇴임식은 27일이다.
‘사심(私心)이 없으면 천지가 넓습니다.’
그가 평소 검찰 후배와 지인들에게 선물한 책 표지 뒤에 주로 적은 글귀다. 공직자가 공(公)에 집중하면 자리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한 검찰 간부는 “선물로 주신 책을 펼치니 그런 당부를 남기셨네요. 차장님께서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라고 댓글에 썼다.
공직을 떠나는 것만큼 중요한 공무도 없다. 봉 차장 용퇴와 검사들 반응을 보니 확실히 그렇다. “벼슬은 짧고 인생은 길다”고 했다. 신념을 고수하고 권력에 굴종하지 않기 위해 사퇴할지 고민하는 현직 검찰 고위 간부에게 전직 검찰총장이 한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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