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오랜 옛날 일 같다. 남북 정상이 세 번 만나 역사적 장면을 만들었던 게. 하지만 불과 지난해였다.
대북 전문가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9월 평양 5·1경기장에서 연설한 것을 ‘이변’으로 여긴다. 어느 곳에서 누구와 함께하든 가장 빛나는 자리에 있어야 할 북한 최고지도자가 20만 명 북한 주민 앞에서 주연을 문 대통령에게 양보했기 때문이다.
배려는 더 이어졌다. 김일성, 김정일 시대를 거쳐 ‘혁명 성지’로 사상 교육을 하는 백두산에 남한 대통령을 들였다. 판문점 회담 때 “백두산과 개마고원 트레킹이 소원이다”고 밝혔던 문 대통령의 ‘꿈’을 바로 실현시켜 준 것.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당시 북한의 의전은 매우 각별하고, 세심했다고 한다. 북한은 백두산 천지 등산을 마치고 오찬을 했던 삼지연 초대소를 급하게 개·보수하고 문 대통령을 맞았다.
이 같은 의전엔 돈이 들기 마련. 지난해 북한 주민의 하루 식량 배급량은 380g에서 300g으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곳간이 비어가는 상황에서도 손님 대접엔 소홀함을 찾기 어려웠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조건이 되는 대로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을 재개하고, 연내 동·서해 철도 및 도로 연결 착공식을 갖기로 약속했다. 예전처럼 남한을 통해 외화벌이 하는 것을, 평양역에 언젠가 KTX 같은 고속철도가 정차하는 꿈을 북한은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핵화 협상이란 현실 장벽은 높았다. 북-미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사이 남북 관계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북한은 우리가 ‘상전’(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지난해 평양에서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맹비난하고 있다. 거세게 ‘평양 청구서’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삶은 소대가리’ 같은 원색적 비난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주로 역적, 역도로 비난했던 것을 감안하면 더 노골적이다. “대통령을 향한 인신공격 강도가 지난 보수정권 때보다 더 높아졌다”는 평가도 들린다.
평양은 왜 분노하고 있을까. 대북 소식통은 “지난해 평양 회담 때 대북제재 때문에 우리가 뭐를 내줄 게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부잣집에서 그런 얘기(경제 협력)를 꺼내면 가난한 집에서는 ‘혹 뭐가 있나’ 기대를 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이런 경협 기대감에 청와대가 원하는 대로 정상들의 ‘그림’을 만드는 데 협조해줬다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정부 일각에서는 북-미 상황이 불확실했던 만큼 의전도, 약속도 수위를 조절했어야 했다는 자성론도 이제 들린다. 훈풍이 언제든 삭풍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뒀어야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내년 남북 상황이 올해보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일부에서조차 북한이 ‘새로운 길’을 구체화하며 남북 관계는 교착 국면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 정부 소식통은 “남북 정상이 3번이나 만났는데 북한이 이렇게 태도를 돌변할지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고 뒤늦게 털어놓기도 했다.
정부는 그간 ‘희망적 사고’로 남북 관계의 맥을 제대로 짚지 못한 것은 아닌지 지금이라도 살펴봐야 한다. 급격히 경색된 남북 관계는 꼬인 북-미 협상의 불똥이 튄 측면이 크지만, 그간 우리가 발신한 대북 메시지가 시의적절했는지도 곰곰이 따져볼 때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