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대통령수석비서관을 지낸 이가 “하루라도 대통령을 못 보면 불안해진다”고 한 적이 있다. 차라리 불려가 깨지는 게 낫지, 대통령이 며칠 찾지 않으면 금단현상이 생긴다고 했다.
권력은 그런 것이다. 치명적 사랑이 중독 되는 것처럼 권력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몰랐으면 모를까 한번 그 맛을 본 사람은, 심지어 권력을 누리다 잃은 사람은, 기어코 권력을 찾으려 들고 찾아선 놓치지 않으려 기를 쓴다. 어떤 정권이든 결국은 비슷하다. 오죽하면 “세상이 바뀌겠어? 이름만 바뀌지…” 대사가 나왔을까.
‘남산의 부장들’ 시대를 살았던 세대는 이 영화에서 정치적 색깔을 빼고 본다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우민호 감독이 강조한 대로 “존중과 배신, 충성, 모멸, 자존심, 시기, 질투 같은 감정이 복합적으로 소용돌이치면서 인간의 감정, 관계의 균열과 파열에서 10·26이 비롯되지 않았을까” 하는 시각으로 집중하면, 심오한 심리 느와르가 보인다.
● 남자의 질투는 ‘혁명’도 불사한다
이병헌은 남산의 부장 김규평 역할을 하면서 박통 저격이 대의를 위한 것인지, 감정과 욕심 때문인지 관객을 헷갈리게 만드는 게 연기 목표였다고 했다. 그의 고뇌하는 표정과 “대국적 정치를 하십시오” 같은 묵직한 대사에 꽂히면 “10·26혁명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하여 혁명한 것”이라는 실제 인물 김재규의 최후 진술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경호실장 곽상천과 멱살잡이를 하는 장면은 ‘우발적 폭발성’이라는 중정부장의 성격적 결함을 드러내는 복선이다. 당시 대법원 판결문에도 10·26은 우발적이라고 보기엔 상당히 계획적이고, 계획적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우발적이라고 적혀 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 등장하는 인물들. 쇼박스 제공
생전의 김종필(JP)은 원작자 김충식 전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김재규가 차지철과 충성경쟁에서 지게 되니까 빵 하고 차를 쏘고 뭐가 미우면 뭐도 밉다고 영감(박정희)까지 쏜 게 10·26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김재규의 ‘김형욱 처리’와 박정희 저격의 날짜 간격이 불과 20일이다. 김재규로선 주군을 위해 어마어마한 충성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주군은 이를 인정해주기는커녕, 깜도 안 되는 경호실장 앞에서 치욕적인 모멸감을 주었다…이렇게 보면 김재규의 행동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 알고 보면 모두 불쌍한 사람이라고?
어디 김재규 뿐이랴. 차지철도, 김형욱도, 세상에 이해 못할 사람이 없다. 알고 보면 모두 불쌍한 사람인 거다.
박정희는 또 어떻고! 그는 중간 실력자들끼리 끊임없이 충성경쟁을 하도록 이간질과 충동질을 하는 분할통치 용인술의 대가였다. JP라인이었던 김형욱은 권력의 칼을 쥐자 박정희와 ‘직거래’로 신뢰를 구축했다. 그 직거래가 끊기면 금단현상이 생기는 것이 21세기 대한민국 정치현실이다.
중독이 되면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양을 투여해야 한다. 사랑이나 권력, 승리를 경험하면 더 많은 사랑, 권력, 승리를 갈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테스토스테론이 강하게 분출돼 사람이 더 똑똑해지고, 더 용감해지지만 더러는 바보처럼 되기도 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뇌를 들여다보면 목표와 보상을 떠올리는 데 쓰는 좌뇌 전두엽은 활성화되지만 위협을 판단하고 자가진단을 하는 우뇌 전두엽은 둔화된 것으로 나타난다.
대통령의 참모와 조직들은 경쟁적으로 대통령이 좋아함직한 보고와 행동으로 충성경쟁에 혈안이었다. 대통령을 우상처럼, 종교처럼 섬기느라 사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박정희는 그런 충성경쟁 덕에 18년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고, 또 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 정치의 원동력은 경제적 이해관계
모든 정치의 원동력은 사적(私的) 이해관계에서 나온다고 ‘독재자의 핸드북’은 일갈한다. 프랑스혁명도 중산층의 경제적 야망에서 나왔다는 해석이 있다. 5·16쿠데타, 12·12 하극상 쿠데타 역시 군의 인사 불만이 크게 작용했다. 유신독재 시절, 박정희의 친위그룹 역시 인사에 미치는 힘을 과시해 장관과 의원들을 주물렀다.
문재인 정부에서 주류세력으로 자리 잡은 386운동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 노무현 변호사를 인권변호사로 키운 사건, 1982년 2차 부림사건에 대해 부산지방법원 판사로서 무죄를 선고했던 서석구 변호사는 “그들의 민주화투쟁은 민주주의보다 정권장악을 위한 투쟁이 아니냐”고 했다(2014년 ‘악마의 변호인’)
청와대 행정관은 같은 편 유재수 전 금융위 국장의 비리 감찰 무마에서 “청와대가 금융권을 잡고 나가려면 유재수가 필요하다”고 했다고 공소장에 적혀 있다. 청와대가 왜 금융권을 장악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정치에서 사적 이해관계와 경제적 동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충분히 알 것 같다.
● 허망해도 좋다, 권력을 누릴 수 있다면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만족하는 것도 아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을 찾으려고…” 영화에서 박통이 혼자 읊조리듯 부르는 ‘황성옛터’에선 권력자의 절대고독과 절대권력의 허망함이 절절히 배어나온다.
그럼에도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는 권력자는 없다. 법과 제도로 권력을 제한하거나, ‘혁명’이라도 맞지 않는 한.
현명하게도 원작자는 “이 책은 역사의 백미러 같은 것”이라고 ‘정답’을 마련해 놨다. 각자의 스펙트럼에 따라 박정희 시대의 공과를 인정하고 역사의 거울을 제대로 성찰할 때 제대로 된 미래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회사 선배이기도 한 원작자는 나의 칼럼스타일에 대해 애정 어린 걱정까지 해주었다. 그래서 여기서 그냥 안전하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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