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복지 안전망이 제대로 설계됐다면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굶어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모 씨(42·여)와 김모 군(6) 모자를 구할 기회가 최소한 다섯 차례는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숨진 지 두 달가량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상태에서 지난달 31일 발견된 한 씨 모자의 통장 속 잔액은 올 2월 1만4108원에서 3858원으로 줄어들었다가 5월 마침내 바닥이 났다. 하지만 그 사이 한 씨 모자의 집 현관문을 두드린 사회복지 담당 공무원은 한 명도 없었다. ① 아파트 월세 체납, 1년 넘게 ‘깜깜’
정부는 2014년 2월 생활고를 겪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송파 세 모녀’의 사건 이후인 2015년 12월 ‘복지 사각지대 발굴 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다. 복지제도가 워낙 다양하고 자격 기준과 신청 절차도 제각각이어서 여기서 소외된 가정을 ‘위기가구’로 선정하고 직접 찾아가 수급 방법을 안내하겠다는 취지였다. 대표적인 게 공공임대주택 월세가 3개월 이상 밀린 경우다. 이러면 지역개발공사 등은 연체자 정보를 보건복지부에 공문으로 알리고, 복지부는 관할 주민센터로 전달해 상담과 조사를 벌이도록 해야 한다.
한 씨는 2009년 12월 탈북민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수료하고 같은 달 서울주택도시공사(SH)로부터 아파트를 임차했다. 이후 월세가 여러 차례 밀려 2017년 1월부터 임차 계약이 해지됐지만 퇴거 조치를 당하진 않았다. 숨진 채 발견됐을 당시엔 월세(16만4000원)가 16개월 치나 밀린 상태였다.
그런데도 한 씨가 위기가구로 분류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아파트가 ‘재개발임대’ 유형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정보 수집 대상 아파트의 유형을 영구임대와 국민임대, 매입임대 등 세 가지로 한정했다. 이들 아파트에 취약계층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산다는 이유였다. 이 때문에 한 씨처럼 재개발임대 아파트에 사는 주민은 월세가 아무리 밀려도 복지부에 통보되지 않는다. 현실과 맞지 않는 기준이다. ② 관리비 체납 통보, 뒤늦게 추진
한 씨는 전기요금도 16개월간 내지 못했다. 전기료를 3개월 이상 체납한 사람의 정보는 한국전력공사가 복지부에 통보해야 한다. 한 씨는 여기서도 제외됐다. 한 씨의 임대아파트에선 전기료를 가구마다 따로 내지 않고 관리비에 포함시켜 관리사무소가 한꺼번에 걷어서 낸다. 한전이 개별 가구의 체납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니 위기가구 발굴 정보에서도 누락되는 구조다. 이는 지난해 4월 ‘증평 모녀 자살’ 사건 때 이미 지적됐던 허점이다. 복지부는 당시 아파트 관리사무소로부터 직접 관리비 체납 정보를 수집하는 대책을 내놓았지만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다.
③ 기초생활 수급 탈락, 조사 대상서 제외
1만4108원, 3858원, 0원…. 지난달 31일 서울 관악구에서 숨진 채 발견된 한모 씨 모자의 통장 속 잔액이 점차 줄어들었을 그들의 희망 크기를 보여주는 듯하다. 경찰은 한씨 모자가 굶어서 숨졌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사망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채널A 제공한 씨는 탈북 직후 기초생활 생계급여를 받다가 아르바이트 등으로 벌이가 생기면서 2013년 9월 수급이 끊겼다. 정부는 기초생활 수급에서 탈락한 사람들도 위기가구로 보고 관리하고 있지만 한 씨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복지부가 ‘최근 1년 내에’ 기초생활 수급 자격을 잃은 사람들만 관리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한 씨는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갔다가 현지에서 이혼하고 지난해 10월 김 군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후로는 이렇다 할 고정 수입이 없었다. 이처럼 기초생활 수급 자격을 잃고 수 년 뒤 형편이 어려워진 경우는 현행 제도로 찾아낼 수 없다는 뜻이다. ④ 고용보험 자격 상실, 처음부터 가입 안 해
고용노동부는 고용보험 가입자 자격을 잃은 뒤 이를 다시 취득하지 않고 실업급여도 받지 않는 실업자의 정보를 복지부에 보내고 있다. 한 씨는 이 과정에서도 제외됐다. 한국에서 비정규직 일자리를 얻었던 2013년 당시에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용보험조차 가입하지 못한 비정규직 근로자는 오히려 안전망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얘기다.
⑤ 영양 공급 지원, 몰라서 신청 못 해
저체중 등 위험 요인을 지닌 만 6세 미만 아동에게 보충식품을 제공하는 ‘영양플러스’ 지원 사업에서 탈락한 적이 있으면 위기가구로 분류된다. 하지만 한 씨는 이런 혜택이 있다는 사실조차 안내받지 못했다. 관할 보건소가 홈페이지 등을 통해 홍보하고 있지만 저소득층을 방문하며 권유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웃 A 씨는 “한 씨는 항상 베이지색 모자를 눌러쓰고 다니며 이웃과 말도 섞지 않았다. 복지 혜택을 스스로 찾아다닐 만한 기운도 없어 보였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