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선진화를 위한 법이 오히려 후진적인 발목잡기 정치에 악용되는 현실을 국민과 함께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2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자유한국당의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 신청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한국당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 철회를 요구하며 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외에 다른 법안에 대해서도 필리버스터 카드를 꺼내든 데 대해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한국당이 제안한 이른바 ‘민식이법’(도로교통법 개정안) 등 일부 민생 법안 처리를 위한 ‘원포인트 본회의’ 개최조차 불투명해진 가운데 청와대와 여당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면서 극단적인 대치 정국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 野 향해 “후진 정치” 비판한 文 대통령
문 대통령은 이날 수보회의에서 “20대 마지막 정기국회가 마비 상태에 놓여 있다. 입법과 예산의 결실을 거둬야 할 시점에 벌어지고 있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상황”이라며 포문을 열었다. 문 대통령이 수보회의를 주재한 것은 11일 이후 3주 만이다. ‘한-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특별정상회의’ 등 외교 일정을 마치고 가진 첫 공식회의에서부터 국회를 향해 날을 세운 셈이다.
특히 문 대통령은 ‘잘못된 정치’ ‘흥정거리’ ‘당리당략’ 등 이례적인 수위의 표현을 동원해 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신청에 대한 고강도 비판을 쏟아냈다. 문 대통령은 “20대 국회는 파행으로 일관했다. 민생보다 정쟁을 앞세우고 국민보다 당리당략을 우선시하는 잘못된 정치가 정상적인 정치를 도태시켰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야당에 대한 작심 비판에 나선 것은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밀리면 집권 후반기 핵심 과제로 꼽은 검찰 개혁의 동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꼭 필요한 법안들을 정치적 사안과 연계해 흥정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안타까운 사고로 아이들을 떠나보낸 것도 원통한데 우리 아이들을 협상 카드로 사용하지 말라는 절규까지 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이 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신청을 민생 법안 처리를 가로막는 ‘법질극’이라고 비난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 무마 의혹과 김기현 전 울산시장에 대한 ‘하명 수사’ 의혹을 둘러싸고 야당이 청와대를 향해 대대적인 공세를 펴고 있는 상황에서 민생 법안과 내년도 예산안 처리 지연의 책임을 야당으로 돌리며 정면 돌파 의지를 내비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문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실 관련 의혹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 5년 연속 법정 처리 시한 넘긴 예산안
여야는 이날도 강 대 강 대치를 이어가며 책임 공방을 벌였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이날 의원총회에서 한국당을 향해 “기존 필리버스터를 철회하고 앞으로 민생 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신청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며 “여러 가지 안을 갖고 이번 정기국회를 마무리하겠다”고 말했다. 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철회가 없으면 나머지 정당과의 연대를 통해 패스트트랙 법안 강행 처리를 모색할 수 있다는 것. 필리버스터는 회기 종료 때까지만 유효한 만큼 10일 정기국회 이후 임시회를 몇 차례 열면 자동 상정된 패스트트랙 법안 처리가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반면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최고위회의에서 “민식이법 통과를 위한 원포인트 국회를 제안했지만 여당이 묵묵부답”이라며 “소수 야당에 보장된 필리버스터 권한을 애당초 틀어막는 대한민국은 독재국가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여야의 패스트트랙 대치 속에 올해 예산안 처리도 2015년 이후 5년 연속으로 법정 시한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이날 예산안의 법정 시한 처리 무산과 관련해 “참담한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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