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 전신)이 17개 광역단체장 중 대구시장과 경북도지사 등 단 두 곳에서만 승리했을 당시 보수 진영에선 “보수정치의 궤멸”이라는 위기의식이 가득했다. ‘당 해체론’까지 나왔고 ‘새로운 보수 가치’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지만, 한국당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거쳐 ‘여론조사 2위 대권주자’ 황교안 대표에게 만족한 채 2년을 보냈다. 그 결과 이번 총선에서 4번 연속 전국 단위 선거 패배, 민주화 이래 최악의 의석수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총선 결과를 “보수정치의 완전한 몰락”으로 규정하면서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는 새로운 보수정치의 좌표를 설정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 자기 프레임에 만족하는 보수정당에 해체 명령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여권에 유리하게 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슈나 통합당의 공천 파동, 막말 논란이 총선 패배의 한 요인이 될 순 있지만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정치 지형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보수정당은 자기 프레임에 갇혀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시민의 마음을 못 얻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특히 “총선에서 야당은 온갖 프레임들을 내세웠지만 국민들은 이에 넘어가지 않았다”면서 “보수정치권은 단순한 야권 통합이나 인물 교체를 넘어서서 시민의 마음을 읽고 제대로 포지셔닝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독선의 문제를 지적했다. 윤 교수는 “이번 총선은 보수정당을 표방한 사실상의 수구정당 해체를 명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수구세력을 퇴출하고 성숙한 민주공화정으로 나아가라는 게 한국인의 일반 의지”라고 총선 결과를 해석했다. 이어 “87년 체제를 통틀어 특정 정권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정치적 기회를 더불어민주당이 획득한 것은 정권의 실력이 진짜 시험대 앞에 섰다는 걸 의미한다”면서도 “한국 보수가 합리적이고 개혁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미래는 없다. 보수는 진정한 공화주의 세력으로 환골탈태해야만 잃어버린 국민의 신망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변화된 시대에 따라 당도 변화해야 하는데 아직도 ‘박정희’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세상 변화에 대응이 되겠느냐”며 “시대가 바뀌는 데 따라가며 외연 확장을 하는 자기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산을 현재에 맞게 발전시키는 대신 정치적 텃밭을 지키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급급한 퇴행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진단이다.
○ ‘공감능력 제로’, 확장능력 잃은 통합당
정치권 현장에서는 통합당이 매번 청년과 여성, 중도층을 강조하면서도 현실에선 이들에게 전혀 공감을 불러오지 못하는 상반된 행동을 하는 점을 지적한다. 이번 총선 기간 논란을 불러온 ‘n번방 호기심’ 발언이나 세월호 유족 비하, 세대 비하 발언 등이 대표적. 통합당은 지난해에도 황 전 대표의 ‘아들 스펙 발언’ ‘외국인 노동자 무(無)기여 발언’ 등 1년 내내 ‘공감능력 제로’ 설화에 시달려왔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 대신 강경 투쟁 일변도로 나서고 있는 전략 역시 대안 정당으로서의 이미지를 심는 데 실패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본인 성향을 ‘중도’라고 밝힌 한 30대 직장인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문제라면 통합당이 민주당을 넘어서는 협상 카드로 야권 버전의 ‘4+1’을 만들어 내는 게 능력 있는 정치 아니냐”면서 “1년 내내 장외투쟁장을 보면서 무엇을 위해 이러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고 했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통합당의 문제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지 부조화’를 꼽았다. 박 대표는 “전국 단위 선거를 4번 연속 패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주류가 완전히 교체됐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며 “위기를 인정해야 해법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자기들이 주류라고 생각하고 ‘보수표가 뭉치면 이긴다’고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 대표는 “중도와 보수, 진보까지 잡는 당을 만들지 않으면, 보수 유튜버 또는 ‘아스팔트 태극기 보수’의 이야기나 듣는 정당이 되면, 갈수록 소수당으로 쪼그라들게 될 것”이라고 했다. 또 “2016년 중도보수가 국민의당을 대거 찍으면서 경고했는데도 변화가 없으니 2018년 지방선거에도 경고했고, 이번엔 민심이 작심하고 야당에 마지막 경고를 한 것”이라고 총선 결과를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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