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미사일 모라토리엄 파기 마지막 수순만 남아”

  • 신동아
  • 입력 2020년 1월 27일 07시 52분


● 북한식 논법에 현혹된 文정부, 美에 허황된 비핵화 의지 전달
● 2년의 골든타임 신기루 찾아 헤매면서 소진
● 핵보유 기정사실화, 핵능력 나날이 고도화
● 장거리 운반체계 완성 위한 시간 벌어줘
● 북한의 선택은 ‘비핵화’ 아닌 ‘고난의 행군’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위한 비밀 핵시설을 영변에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이지만, 그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국제 이슈로 등장한 것은 1989년 9월 프랑스 상업위성 SPOT 2호가 영변의 거대한 비밀 건설 현장 사진을 세계 언론에 공개한 때부터였다. 그때 ‘북한 핵 문제’라는 생소한 이슈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이다.

반복된 실패와 파국 : 북한 핵 30년

최근 30년의 역사는 현존하는 북한 핵 문제를 이해하고 판단하고 예측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30년 전의 상황 전개가 그간 무수히 거듭 반복됐고 지금도 기본적으로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2~3년간 북한과 미국 사이에 벌어진 위기와 협상 과정은 지난 30년간 수차례 반복돼 온 일이고, 실패와 파국의 과정 역시 과거와 거의 다를 것이 없다.

북한이 30년간 핵무기 개발을 완수하기 위해 동원해 온 모든 외교적 전략과 책략, 대외적 합리화와 거짓말, 집요한 주장과 요구사항, 지연작전과 벼랑 끝 전술, 위협과 협박, 가식적 합의와 합의 파기 등 험난한 역사는 족히 몇 권의 책이 될 정도로 방대하고 다양하다. 그처럼 모든 가용 수단을 동원해 핵 개발에 일로매진하다 보니, 요즘 북한의 외교 행태는 별로 새로운 것이 없고 모든 주장과 전략이 최근 30년간의 패턴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요즘 미국에 주장하고 요구하는 말은 30년 전 할아버지 김일성이 부시 행정부에 하던 말이나 아버지 김정일이 클린턴 행정부에 하던 말과 토씨 하나 다를 것이 없다. ‘비핵화 의지’ 표현도 똑같고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이유로 비핵화를 거부하는 논법도 변한 것이 없다. 한 가지 유일한 차이는, 과거에는 북한이 핵무기를 몰래 제조하는 과정에 있었으나 지금은 핵 개발이 완료되고 핵보유국임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점이다.

최근 북한이 비핵화의 조건으로 ‘체제 보장’ 요구를 제기하자, 비핵화 실현을 위해 미국이 체제와 안전을 보장해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순진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북한이 비핵화 거부와 합의이행 지연을 위한 책략의 일환으로 ‘체제 보장’ 문제를 제기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미국이 그 말에 속아 정말로 체제 보장을 해주려 시도하다 뒤통수를 맞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북한은 1993년 제1차 북핵위기 때도, 2002년 제2차 북핵위기 때도 비핵화 선결조건으로 체제 보장, 적대시 정책 철폐, 북·미 수교, 평화협정, 경제지원, 경수로 건설 등 거창한 조건을 무수히 내걸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조건들이 충족되면 비핵화를 정말로 하겠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었다. 단지 그것들이 모두 실현될 때까지는 비핵화를 절대 하지 않겠다는 거부의사 표시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도저히 실현 불가능하고 장구한 세월이 소요되는 다른 사안들을 핵 개발 포기의 ‘선결 요건’으로 장황하게 열거한 것일 뿐이었다.

북한식 논법에 현혹된 文정부

국제사회가 이 같은 북한식 논법의 진실을 깨닫는 데는 수십 년간의 오판과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그러니 2018년 초 새내기 한국 정부가 북한식 논법에 현혹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허황된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전달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2018년 초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시작된 한국, 북한과 미국의 ‘북한 비핵화 쇼’는 이제 곧 ‘진실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북한의 핵무장 완성을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했을 최근 2년의 골든타임은 ’협상을 통한 비핵화’의 신기루를 찾아 헤매는 데 소진됐다. 그사이 북한의 핵보유는 기정사실화됐고 핵능력은 나날이 고도화되고 있다. 눈속임으로 폐쇄했던 핵실험장과 미사일발사대도 원상복구되고 있다. 이제 북한이 핵과 미사일 모라토리엄(moratorium)을 공식 파기하는 마지막 수순만 남아 있다.

북한은 1월 1일 김정은 위원장의 노동당 중앙위 제7기 5차 전체회의 보고를 통해 제재 해제 문제에 대한 미국의 진일보된 태도 전환이 없을 경우 핵·미사일 모라토리엄을 파기할 것임을 예고했다.

최근 2년간의 북·미 핵협상이 2017년의 살벌했던 북·미 간 치킨게임(chicken game)을 대화 모드로 전환시켜 무력충돌을 방지한 긍정적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대로 북한에 핵무기의 고도화와 장거리 운반체계 완성을 위한 귀중한 시간적 여유를 제공한 역효과 또한 간과돼서는 안 된다. 이는 1993년 촉발된 제1차 북핵위기 당시 ‘제네바합의’(1994)가 북한에 우라늄농축 시설을 비밀리에 건설할 시간과 자금을 제공한 것과 마찬가지며, 또한 2002년 이래의 제2차 북핵위기 당시 ‘6자회담 9·19 공동성명’(2005)이 북한에 대규모 비밀 우라늄농축 시설 건설과 원자탄, 수소탄 및 장거리미사일 개발을 위한 기술 축적의 시간을 벌어준 것과도 다를 바 없었다.

북·미 핵협상에 관한 최근 2년간의 온갖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비핵화는 단 한 발짝도 진전되지 못했다. 그간 세 나라 정상이 벌여온 현란한 외교 쇼를 통해 국제사회는 두 가지 불편한 진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첫째, 북한은 전면 비핵화를 이행할 의사가 전혀 없고 제재조치 해제에만 관심이 있다는 점이다. 둘째, 한국과 미국 정부는 공히 북한의 비핵화 실현보다는 협상을 위한 협상과 그에 따른 국내 정치적 이익에 주로 관심이 있다는 점이다. 이를 감안할 때, 북한 비핵화를 위한 협상이 직면한 현재의 암울한 교착상태는 당연하고도 불가피한 귀결이다. 해피엔딩의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미국이 북한 요구대로 제재조치를 해제한다고 북한이 전면 비핵화를 단행할 가능성도 없고, 그렇다고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도 없는 상황에서 미국이 제재조치를 해제한다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는다.

세 나라 정상이 벌인 현란한 외교 쇼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문재인 대통령(왼쪽부터). [뉴시스]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문재인 대통령(왼쪽부터). [뉴시스]
표면적으로는 미국과 북한이 아무 성과 없이 2년의 시간만 낭비한 듯 보이지만, 양측 모두 나름대로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 물론 과거와 마찬가지로 가장 큰 소득은 북한이 대부분 챙겨갔다. 첫째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수십 년간 꿈에 그리면서도 실현하지 못한 북·미 정상회담이 김정은 시대에 세 차례나 개최됨으로써, 북한의 국제적 위상이 고양되고 양측 정상 간 직접대화 창구가 열렸다는 점이다. 둘째, 2017년 후반의 살벌했던 북·미 관계가 협상 국면으로 전환됨에 따라, 북한이 미국의 군사공격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됐다는 점이다. 셋째, 북한이 2017년 11월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기 수년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계획해 왔듯이, 2년간의 협상기간을 통해 핵보유국의 위치를 사실상 기정사실화했다는 점이다. 넷째, 미국과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핵과 장거리미사일 분야의 미흡한 기술적 장애들을 극복하고 핵능력을 업그레이드 할 안전한 여유 시간을 갖게 됐다는 점이다.

북한이 2년간의 협상 과정에서 유독 제재조치 해제에만 집착한 이유는 그 밖의 다른 목표들이 이미 모두 성취된 데 있기도 하다. 이를 감안할 때, 2년간의 북·미 핵협상에서 승자는 단연코 북한이다.

북한이 협상 원한 건 핵능력 감축


한편 미국은 북한을 압박해 비핵화 진전을 이루는 데 실패했고 북한의 핵무장 기정사실화 전략에 이용만 당한 형국이 됐으나, 그럼에도 그 나름대로 중요한 소득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 소득은 북한에 비핵화 의지가 없음을 북한 최고지도자에게서 직접 명확히 확인한 점이었다. 북한은 이미 고철 수준에 이른 영변 핵시설을 전부 또는 일부 포기하는 대가로 제재조치 전면 해제를 얻어내는 것 이상의 복안은 갖고 있지 않았다. 북한이 협상하기를 원한 건 핵능력의 감축(nuclear arms reduction)이었지 핵의 전면 포기를 통한 비핵화(denuclearization)가 아니었다. 미국은 이러한 사실을 간파함으로써 하노이 제2차 정상회담에서 싱가포르 회담 때와 같은 실수의 반복을 피할 수 있었다.

미국이 얻은 두 번째 소득은 유엔의 대북 제재조치가 예상보다 훨씬 큰 실질적 고통을 북한에 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점이었다. 사실 유엔 제재조치의 실효성 여하에 대해서는 미국과 국제사회 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이젠 누구도 제재의 강력한 효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됐다. 미국이 협상 과정에서 북한의 온갖 유혹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제재조치 해제 불가 입장을 끝내 고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북한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제재조치는 2006년 이래 10차례나 채택됐으나, 트럼프 행정부 이전의 제재조치들은 실효성도 없고 다분히 형식적인 조치였다. 진정한 제재는 2017년 8월, 11월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와 9월의 제6차 핵실험을 계기로 채택된 제8차, 9차, 10차 제재결의에 의해 비로소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제재조치는 북한의 3대 주력 수출품인 광산물, 섬유제품, 수산물의 수출을 전면 금지했고, 북한 노동자의 수입을 금지했으며, 북한에 대한 연간 유류공급량을 제한했다.

이로 인해 북한의 대외수출은 90% 넘게 감소했고, 무역외 외화 수입도 급감했으며, 부족한 유류를 밀무역을 통해 조달하는 실정이다. 북한은 제2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전체 핵능력의 20~30% 미만에 불과한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는 대가로 이들 제재조치를 모두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고 회담은 결렬됐다. <표1>은 북한이 제재조치 전면 해제의 대가로 폐기를 제의한 이른바 ‘영변 핵시설’이 북한의 전체 핵시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작은지 여실히 보여준다.

비핵화 협상의 종언

북한 핵 문제의 미래를 전망할 때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는 북한이 과연 모든 조건이 충족될 경우 핵무장을 진정으로 포기할 의사가 있는지다. 말하자면, 북한의 이른바 ‘비핵화 의지’의 진정성에 관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의 ‘비핵화 의지’는 한국과 중국 정부 그리고 관련국들 내의 진보적 논객들에 의해 많이 제기됐으나 정작 북한은 그런 의지를 표명한 적이 없다. 오히려 북한은 김정일 시대부터 줄곧 북한의 핵 프로그램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고 누차 공식 천명해 왔다.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가 없다’는 북한의 거짓말은 2006년 제1차 핵실험이 실시되기 이전의 일이고, 핵실험 이후로는 핵 개발을 부정한 적도 없고 핵 포기 의지를 표명한 적도 없다.

모든 핵 포기는 상상할 수도 없는 비현실적 가정


<표2>는 북한이 최근 30년간 공식 표명한 비핵화에 관한 입장을 모두 취합한 것이다. 이 역사적 기록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비핵화 문제에 대한 북한의 공약이 해가 갈수록 점점 애매하고 희미해졌고, 2018년의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 공동성명과 남북 평양공동선언에 이르러서는 구체적 약속이 아예 사라졌다는 점이다. 2006년 최초 핵실험 이전에 북한은 국제사회의 강력한 의혹 제기에도 불구하고 핵개발 사실을 집요하게 부인했다. 1991년의 남북 비핵화공동선언에서 2005년의 9·19 6자회담 공동성명에 이르기까지 북한은 4차례에 걸쳐 핵 개발 사실을 부인하고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폐기한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킨 적은 한 번도 없다. 더욱이 2006년 제1차 핵실험 이후로는 북한은 구체적인 비핵화 의사를 아예 표명한 적이 없고, ‘북한 핵 문제’라는 표현조차 ‘한반도 핵 문제’로 슬그머니 변경해 문제의 초점을 희석해 버렸다.

따라서 앞으로 어떤 형태의 핵 협상이 계속되건 그 협상을 통해 북한의 전면 비핵화가 합의되고 이행될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판단일 것이다. 더욱이 북한이 핵 개발을 완성하고 핵무기 소형화와 수소탄 개발까지 완료한 상황에서 핵을 모두 포기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비현실적 가정이다. 누구도 수긍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기는 하나, 앞으로의 북한 핵 문제를 이해할 때 꼭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최근 30년에 걸친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은 2017년 북한의 ‘핵무력 완성’ 선언으로 이미 끝났으며, 비핵화 협상은 이제 진행형이 아니라 이미 종결된 사안이라는 점이다.

최근 2년간의 북·미 핵 협상은 비핵화 협상의 종말을 최종 재확인하는 사망진단서 발급 과정에 불과했다. 앞으로 다른 형태의 핵 협상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건 더는 비핵화 협상(Denuclearization Talks)이 아닌 핵군축 협상(Nuclear Arms Reduction Talks)이 될 것이다. 북한 핵능력을 일부 감축하는 대가로 제재해제 또는 경제지원 등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협상 말이다.

한국 정부의 경우 어떻게든 유엔제재를 우회해 도로건설, 철도건설, 식량원조, 개성공단 재개 등 대규모 대북 경제지원을 실현시키려는 집념 때문에 협상이 부분적으로라도 타결되기를 선호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런 부분적이고 단계적인 협상 타결을 통해 한국이나 미국이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북한 핵무기가 60개에서 30개로 줄어든다고 한국의 안보 위험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핵탄두를 모두 폐기하고 5개의 수소탄만 남긴다고 해도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대가로 제재조치를 일부 해제하고 경제지원을 제공한다면 오히려 핵보유국 북한에 큰 날개를 달아주는 결과만 초래할 것이다. 그에 따른 북한의 새로운 외화 수입은 결국 핵과 미사일 전력 강화를 포함한 대남 군사력 증강에 우선적으로 투입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희망의 끈 : 유엔 제재조치

30년간의 북한 핵문제가 북한의 최종 승리로 막을 내린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이후의 상황이 북한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북한의 핵 보유는 양날의 칼이다. 핵으로 인해 북한의 안보가 더 견고해지고 한국에 대한 확고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한 것은 사실이다. 장차 핵무기를 내세워 한국에 경제지원을 강요하거나 북한이 선호하는 방식의 통일을 강요하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장을 통해 잃는 것도 결코 적지는 않다. 첫째, 북한이 핵무장을 고수하는 한, 북한은 유엔의 제재조치 때문에 동아시아의 다른 개도국들처럼 외국인 투자와 무역을 통한 경제 번영을 영원히 이루지 못할 것이다. 둘째, 유엔의 제재조치가 지속되는 한, 설사 중국을 통한 제한적 밀무역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국가경제가 정상화될 가능성은 매우 작고, 이 때문에 내부적 체제 불안이 계속될 것이다. 셋째, 한국에 아무리 호의적인 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유엔제재 때문에 대규모 대북 경제지원을 제공하기 어려울 것이며, 그 때문에 북한 경제 사정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군사력 유지도 점점 힘겹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유엔의 제재조치가 존속되는 한 북한 주민은 앞으로도 수십 년간 가난하고 불안정하고 고립된 삶을 살아가야 할 상황이다. 이는 북한에 핵무장이 가져온 ‘성공의 저주’이기도 하다. 북한의 핵무장은 체제 및 정권 유지와도 직결된 사안이므로 경제난이 심하다고 핵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북 제재조치 8, 9, 10호가 채택된 이래 최근 1년간 급속히 황폐화된 북한 경제를 감안할 때, 김정은 위원장이 현재의 제재조치들을 그대로 안고 앞으로 수십 년간 북한을 통치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북한은 그간 제재조치 해제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북한이 현재 미국과의 핵 협상에 나오는 거의 유일한 이유는 제재조치를 해제하기 위한 것이다. 북한이 2019년 초까지 한국에 호의를 보인 것도 제재조치 해제를 위한 대미 협상에서 측면 지원을 받기 위해서였다. 제재조치 문제가 없다면 북한은 미국과 협상할 필요도, 한국과 대화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벼랑 끝 전술 통한 대미 압박

이러한 제재조치 때문에 북한은 과거와 달리 시간에 쫓기는 상황이 됐다. 이는 북한이 과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환경이다. 최근 30년간의 북핵 협상에서 시간은 항상 북한의 편에 있었고, 대화 상대방인 한국과 미국은 항상 시간에 쫓기는 상황이었다. 북한은 협상 타결이 지연되건 합의 이행이 교착되건 아무 불편할 일이 없었고, 오히려 여러 이유로 협상의 타결과 이행을 고의로 지연시키는 일이 빈번했다.

반면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핵 개발 진척을 막기 위해, 또는 선거 등 국내정치 일정상의 이유 때문에, 또는 협상대표의 짧은 임기 중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하는 부담 때문에 항상 시간에 쫓겼다. 그 때문에 대북 협상에서 최선의 합의를 이루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고, 대개의 경우 북한에 현저히 유리한 합의가 이뤄지는 것이 상례였다. 1994년의 ‘제네바합의’도, 2005년의 ‘9·19 공동성명’도, 2018년의 ‘북·미 싱가포르 합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일방적으로 북한 편에 있던 호시절은 끝나고 상황은 역전됐다. 경제난에 쫓기는 북한은 미국의 조속한 제재해제 결단을 촉구하고자 2019년 말을 협상시한으로 천명하고 ‘중대조치’를 위협하는 등 전통적 벼랑 끝 전술을 통한 대미 압박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눈앞으로 다가온 대선을 앞두고 북한에 부당한 양보를 할 수도 없고 군사 공격도 부담스러운 트럼프 행정부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북한과 ‘좋은 관계’라는 외교적 수사만 반복하면서 무시와 지연작전을 구사한다. 최첨단 정찰기와 폭격기 등 군사적 수단이 대거 동원된 엄중한 대북 경고도 병행됐다.

크리스마스 또는 2020년 신년사를 전후해 터져 나올 것으로 전망되던 북한의 ‘중대조치’는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과의 협상판을 완전히 깨기에는 북한으로서도 대단히 부담스럽고 그 밖의 대안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예상했던 장거리미사일 시험발사, 추가 핵실험 등 북한의 현상 타파 조치는 시일이 다소 지연되더라도 실행에 옮겨질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악명 높은 외교협상법인 ‘벼랑 끝 전술’은 일단 공언한 위협을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실행에 옮겨야만 그 효과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북한이 한번이라도 벼랑 끝에서 먼저 물러서면 다음부터 누구도 그 협박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북한은 벼랑 끝에서 한 번도 그대로 주저앉은 적이 없다. 상대가 굴복하지 않으면 아무리 피해가 크더라도 스스로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는 길을 택하곤 했다. 과거에는 그런 상황이 되면 으레 협상타결 시한에 쫓기던 상대방이 먼저 북한의 위세에 굴복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 타결을 서두를 이유가 없으므로, 시간이 북한의 반대편에 있는 상황을 십분 이용하려 할 전망이다.

북한의 선택은 ‘비핵화’ 아닌 ‘고난의 행군’

2019년 12월 29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이 발언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2019년 12월 29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이 발언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장기적 제재조치로 경제난이 아무리 악화된다 해도 북한이 그 때문에 전면 비핵화의 결단을 내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한의 선택은 응당 새로운 ‘고난의 행군’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현재 직면한 심각한 외화 부족으로 인해 가장 고통받는 계층은 주로 북한 지도부와 군부 등 특권층이므로, ‘고난의 행군’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제재조치가 장기간 견고하게 지속될 경우, 극단적 경제난으로 인해 사회주의 경제체제 와해, 체제 내부의 동요, 지도층 교체, 정치체제 변혁 등 뜻밖의 사태가 발생해 한반도에 큰 변화가 초래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그리 가까운 미래의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외교적 협상을 통한 비핵화 실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현실 인식을 토대로, 핵을 가진 호전적 북한과 장기간, 어쩌면 앞으로 수십 년간 등을 맞대고 살아가기 위한 실질적 대처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한가롭게 북·미 핵협상을 바라보며 일희일비할 때가 아니다.

북한이 30년간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굳이 핵무장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한반도 유사시 대미 핵 위협을 통해 미국의 군사지원을 차단할 수만 있다면 재래식 군사력만으로 능히 한국군을 제압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에 있다. 따라서 한국군이 재래식 전력 면에서 북한을 제압하기에 충분한 자주국방력을 구축한다면 북한의 핵무기들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핵무기에 대한 북한의 집착도 크게 감소할 것이다. 이를 감안할 때, 우리가 북한의 핵무장에 대처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은, 첫째 남북군사합의와 한미 합동훈련 중단으로 심각하게 훼손된 대북한 군사적 억지력을 조속히 원상태로 복원해야 한다. 둘째, 미사일방어망(Patriot/THAAD/SM-3)을 대폭 확충해 일본 수준의 전국적 방어망을 구축해야 한다. 셋째, 북한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한 재래식 군사력을 향후 수년에 걸쳐 신속히 구축함으로써, 미국의 지원 없이도 북한의 침공을 격퇴하기에 충분한 자주국방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 밖에 독자 핵무장, 미국 전술핵 반입, 핵 공유 등 다양한 핵 억지력 확보 방안들이 각계에서 논의되고 있으나, 이들은 모두 미국의 명시적 양해와 동의를 필요로 하고 또한 국민적 합의가 전제돼야 할 고도의 정치적 사안들이다. 이 문제들에 대한 논의는 위의 재래식 군사력 확충 문제와는 별개로 정치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이용준


● 1956년 출생
● 경기고,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북핵담당대사 겸 북핵외교기획단장
● 외교부 차관보주이탈리아 대사
●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심판’)
● 저서 : ‘베트남, 잊혀진 전쟁의 상흔을 찾아서’ ‘게임의 종말’ ‘북핵 30년의 허상과 진실’

이용준 前 외교부 북핵대사·차관보

[이 기사는 신동아 2020년 2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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