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의 역병 조문을 정리하면 1392년부터 1864년까지 470여 년간 모두 1400여 건의 역병이 검색된다. 1420년 시작된 조선 전기의 전염병은 황해도와 평안도 등 이북지역에 집중됐다. 백성들은 역병이 낳은 기근과 전염의 공포를 피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선택하는 이들이 많았다.
전염병의 진단과 치료에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대응한 이는 허준이었다. 허준은 자신이 동의보감을 저술하게 된 이유를 전염병과 전란으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지 않아 국가가 소멸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16세기 후반은 전염병 발생이 특히 잦았다. 임진왜란 와중에 유행한 학질로 노인과 어린이들이 집중적으로 사망했다. 실록의 기록이다.
“이때 학질(학疾)이 한창이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중국에서 건너온 당학(唐학)이라 불렀으며 노인과 어린이가 많이 죽었다.”
일반인은 허준의 가장 큰 업적을 동의보감 저술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의 열정은 전염병 관련 저서 편찬에 집중돼 있었다. 신찬벽온방, 벽역신방, 언해두창집요 등이 그것이다.
동의보감의 ‘온역문’에는 전염병에 대한 평생의 연구 성과가 잘 정리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온역병 예방음식은 지금의 상식과 일치하는 점이 많아 흥미롭다. 정확하게 “음력 정월에 다섯 가지 매운 음식을 먹으면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기록했다. 마늘 대파 부추 생강 염교가 바로 그것. 마늘의 성질이 맵고 따뜻한 것은 많은 이들이 아는 상식에 속한다. 부추는 자신을 덮은 눈을 다 녹일 정도로 뜨겁다. 겨울을 지낸 대파는 아무리 시들어도 흙만 닿으면 바로 살아나는 강력한 생기를 가지고 있다. 생기는 양기의 다른 이름으로, 인체의 온기를 북돋우는 데는 가장 좋은 음식이라 하겠다.
면역력의 핵심은 자기에게 맞는 섭생을 찾아 실천하는 데 있다. 배가 자주 아프고 물을 마시며 속이 불편하거나 냉기가 많은 사람은 체온을 올리는 양적인 면역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위의 음식 외에 인삼이나 홍삼도 크게 도움이 된다. 양적 면역력이 있다면 음기를 북돋우는 음적 면역력도 있다. 한방에서 음기는 끈끈한 점액, 즉 음액을 가리킨다. 냄비의 코팅처리처럼 자연 면역의 최전선에서 신체의 외부를 감싸고 방어한다. 각종 병원체들은 이 점액에 붙잡혀 신체 외부로 배출된다. 우리 몸은 쉴 새 없이 새로운 점액을 공급해 끈끈함을 유지한다.
특히 코로나19는 폐에 많은 손상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폐의 음액을 보충하는 음식은 더덕이나 도라지다. 도소주는 도라지가 주재료고 방풍(防風), 육계(肉桂) 등의 약재도 들어가는 술이다. 옛 어른들은 정월 초하룻날이 되면 꼭 이 술을 찾아 역병 예방주로 먹었다. 더덕은 고추장을 발라 구워서 먹는다. 그만큼 차고 촉촉한 음적 성분이 많은 음식이다. 기침을 진정하는 데 좋은 음식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목이 건조하고 마르면서 기침이 잦은 이들이 먹으면 도움이 크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전염병 예방약을 매일 음식으로 먹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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