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사태는 가까스로 넘겼지만 여진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일본이 수출 규제 해제에 미온적으로 나오자 청와대와 여당에서 ‘조건부 연장’을 강조하며 지소미아 종료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리고 있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일본에 대해 “트라이 미(Try me)”라고 한 게 대표적이다. 자꾸 나를 건드리면 언제든지 지소미아 종료 버튼을 다시 누르겠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은 “일본에 주어진 기간은 40일”이라며 일본의 태도가 올해 말까지 변하지 않으면 지소미아를 종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운 외교부도 이런 기조에선 다르지 않다. 조세영 1차관은 데드라인에 대해 “몇 개월 정도(만 기다릴 수 있다)”라고 했다.
정부여당 인사들의 이런 반응을 접하면서 필자는 지소미아 종료 시한 직전에 다양한 기회로 만났던 미 행정부 인사들의 말과 표정이 떠올랐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지만 비공개를 전제로 만났기에 이들이 누구인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소개할 수 없다. 다만 이들의 반응이 외교적으로 통용되는 표현의 수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고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요약하면 한국에 대단히 실망했고(disappointed), 이런 상황이 황당하다(embarrassed)는 것이었다. 이들의 반응이 반드시 정당하거나 합리적이라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나라에 와서 이렇게 말해도 되나 싶은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좋든 싫든 우리의 지소미아 종료 카드, 그로 인해 한미동맹이 흔들리는 상황에 대해 미국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강경했다는 것이다. 미 국무부가 지소미아 조건부 연장 결정에 대해 갱신(renew)이라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표현을 사용한 건 이런 기류를 완곡하게 담아낸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 사람들은 지소미아 카드로 이른바 ‘한국식 벼랑 끝 전술’이 먹혔다는 데 방점을 둔다. 한 고위 관계자는 “우리가 지소미아 종료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막판에 미국이 움직여서 일본을 설득할 수 있었겠느냐”고 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효과가 있었다고 해서 일본에 수출 규제 해제를 압박하기 위해 지소미아 종료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리는 한국을 미국이 어떻게 바라볼지는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정부가 지소미아를 조건부 연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정부가 지난달 22일 오후 6시에 발표하기 수 시간 전 미국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팩트와 기대가 뒤섞여 있었지만 한국 정부가 입장을 바꾸었다는 구체적인 정황이 담겨 있었다. 당시 워싱턴은 새벽이었다. 그만큼 이 사안을 한미동맹, 한미일 안보 핵심 현안으로 보고 24시간 촉각을 곤두세웠다는 얘기다. 우리 정부도 미국의 이런 점을 활용해 일본의 태도 변화를 유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소미아에 대한 미국의 생각을 이렇게 확인했는데도 버젓이 지소미아 종료 카드를 또 흔든다면 우리가 과연 트럼프보다 한미동맹에 대해 더 절실하고 수호 의지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주한미군 분담금을 50억 달러 내라는 트럼프의 동맹 인식이 천박하다고 마냥 비판할 자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제 지소미아 카드를 협상 칩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을 유지하는 선에서 대처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한미동맹을 스스로 옭아매는 이런 식의 자해적 협상은 우리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이 다른 건 몰라도 전통적으로 안보에는 여야 구분 없이 보수적이다. 트럼프 시대엔 더 말할 것도 없다. 안보를 담보 삼는 도박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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