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세상 만들기 외길…인촌상 영광의 얼굴들 수상소감

  • 입력 2003년 9월 21일 18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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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인촌상 수상자가 선정, 발표됐다. 인촌 김성수 선생의 탄생 112주년이 되는 올해에는 교육, 언론출판, 문학, 학술 등 4개 부문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인사들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번 심사는 부문별로 전문가 4, 5명이 참여한 가운데 3개월간 공정하게 진행됐다. 인촌상을 수상하게 된 네 분의 삶과 공적사항, 수상소감 등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인촌상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교육 부문▼

“이번 상은 아직 ‘젊으니’ 교육을 위해 좀 더 애쓰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교육 부문 수상자인 정범모(鄭範謨·78.사진) 한림대 석좌교수는 수상 소감을 이같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교육 붕괴나 교육 이민 등의 말이 생길 정도로 교육이 황폐화된 상황에서 교육에 기여한 공로로 상을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며 교육현실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경성사범학교 재학 시절 교생실습을 나갔다가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이끌려 교육의 길을 택한 그는 1954년 서울대 교수로 강단에 선 후 교육방법에 통계와 검사 등 과학적인 기법을 도입하는 등 교육의 과학화에 기여해 왔다.

“교육은 국가의 존망과 직결돼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사들은 교직에 대해 경건한 마음을 갖고 학생들을 지도해야 합니다.”

그는 한국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들에게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하고 사기를 북돋워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공이 도자기를 빚는데 옆에서 흙은 어떤 걸 써라, 불 온도는 이렇게 하라고 간섭하면 신이 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는 교사 스스로도 전문적 식견과 교직에 대한 애착을 가진 ‘명 도공’이 될 것을 당부했다.

‘원로’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는 영원한 ‘현역’으로 남아 연구 활동에 매진하길 원한다. 지금도 교육 관련 학술 세미나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고 올해 말 탈고를 목표로 저서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 발간한 ‘한국의 교육세력’이란 책도 이 같은 연찬(硏鑽)의 산물.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연구와 집필에 매진할 계획이다.

“교육계에 몸담은 이들 모두가 자신의 일에 매력을 느끼고 매진할 때 교육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부와 명예는 부수적인 것일 뿐이죠.”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정범모씨 공적사항: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1954년 29세에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임용된 뒤 1978년 충북대 총장으로 옮겼다가 1982년부터 한림대에 재직 중이다.

학술원 회원인 그는 ‘교육과 교육학’(1968), ‘미래의 선택’(1986), ‘한국의 교육세력’(2000) 등 다양한 교육 관련 저서를 펴냈다. 또 지능검사, 성격검사, 적성검사 등 심리검사 방법을 연구해 표준화함으로써 교육학의 과학적 연구 도구를 제공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한림대 총장을 지냈으며 총장 퇴임 후에도 석좌교수로 지금까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언론출판 부문▼

“정말로 받고 싶었던 상입니다. 사표(師表)로 삼아온 인촌의 뜻을 기리는 상이라 제겐 의미가 남다릅니다.”

언론출판 부문 수상자인 박맹호(朴孟浩·69.사진) 민음사 사장은 수상의 기쁨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특히 사회 각 부문에서 신진을 육성했던 인촌의 면모를 ‘나도 따르리라’ 했었죠.”

37년 전 민음사 창립 때 박 사장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신진들과 같이 시작하면서 그 사람들과 같이 클 수 있는 출판사가 되자’는 것이었다. 그는 70년대 ‘오늘의 시인’ 총서, ‘오늘의 작가상’ 제정 등을 통해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오늘의 작가상’의 부상이 수상자의 책을 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진 작가들은 자기 책 한 권 낼 엄두를 못 내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우리 문화계에 당당히 자리매김하게 된 ‘신진’들이 시인 김수영 정현종 강은교, 소설가 한수산 이문열 등이었다. 최근에는 인문학 부흥작업의 일환으로 ‘올해의 논픽션상’을 제정해 첫 수상작들을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박 사장은 후배 출판인들 사이에서 “한국 출판에 현대적 경영 개념을 도입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출판계가 저작권협약 가입 자체를 기피했던 80년대에 이미 “단기 이익에 연연하지 말고 세계시장을 봐야 한다. 하루빨리 저작권협약에 가입해야 언젠가 우리가 저작권을 팔 때 권리를 지킬 수 있다”는 의견을 거침없이 내놓기도 했다. 그의 예측대로 한국은 최근 2, 3년 사이에 어린이 책 저작권 등을 해외에 파는 나라가 됐다.

“이구동성으로 출판계가 어렵다고 하지만 한국만큼 출판산업이 역동적인 나라는 없습니다. 이제는 세계를 바라보아야 해요. 한국의 작가와 학자는 세계인을 독자로 삼아 글을 써야 하고, 출판인들도 세계 수준의 출판기업을 일구어야 합니다.”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박맹호씨 공적사항:

1966년 민음사를 창립해 전집 방문판매가 주를 이루던 출판계에 ‘단행본 기획출판’이라는 새 조류를 이끌었다. 70년대 당시 무명이던 김수영(金洙暎) 시인의 시집 ‘거대한 뿌리’를 제1권으로 한 ‘오늘의 시인총서’를 비롯해 ‘오늘의 작가총서’ ‘세계시인선’을 출간했다.

‘21세기 문화총서’ ‘대우학술총서’ 등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기반이 되는 책 발간에도 힘을 기울였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90), 서울시 문화상(2002),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등을 수상했다.

▼문학 부문▼

문학 부문 수상자 이청준(李淸俊·64.사진)씨에게 올해는 일찌감치 ‘의미가 큰’ 해로 예고됐다. 2월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이 초판 발행 27년 만에 100쇄를 돌파했다. 3월 25권 분량의 ‘이청준 문학전집’이 완간됐다. 5월에는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한 두 권짜리 방대한 신작 장편 ‘신화를 삼킨 섬’이 5년 만에 발간됐다.

한국 현대소설사에서 가장 지성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그는 인간의 정신과 언어의 자유에 천착해 왔다.

“이대로 쉴 수 없겠구나, 세상에 빚을 지고 있으니 다시 스스로를 추슬러야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60대 중반의 나이에도 팽팽한 창작의 긴장을 놓지 않고 있는 작가는 인촌상 수상 소식을 듣고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

“과거에는 정치 경제가 불안해도 문화가 세상과 삶을 떠받쳤습니다. ‘감싸기’의 문화였죠. 오늘날에는 정치 하나가 불안하면 모든 것이 위태로운 ‘홑겹사회’가 되어버렸어요. 인촌이 동아일보 사시(社是)에서 강조한 ‘문화주의’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최근 진행 중인 일에 대해 묻자, 그는 “의욕과 집중력에는 자신이 있는데 젊은 작가들의 ‘정보처리 속도’를 따를 수 없어 고민했다”고 털어놓았다. 돌파구로 마련한 것이 유년시절 고향 전남 장흥에서 체험한 ‘선인들의 삶과 지혜’.

“지난 시대 인물들의 면모와 신화적 삶, 풍속에는 아직 체계화된 정보로 정리되지 않은 풍부한 문학적 자산들이 있어요. 공동체를 제대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힘이 들어 있죠. 이를 문학적 언어로 정리하는 일에 힘을 쏟고자 합니다.”

그는 “서로 배제하지 말고 감싸며 살아야죠. 누구나 홀로 설 순 없어요”라며 말을 마쳤다. 온갖 갈등이 분출하는 이 사회에 대한 고언(苦言)으로 들렸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이청준씨 공적사항: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65년 단편 ‘퇴원’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 공모에 당선돼 등단. 이후 ‘병신과 머저리’(1966) ‘당신들의 천국’(1975)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1) 등을 통해 권력과 이념의 억압에 처한 인간의 반응을 깊이 있게 형상화했다.

‘서편제’(1974) ‘축제’(1996) 등 한국인의 원형의식을 조명한 작품은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화돼 국내외에서 상영됐다.

동인문학상(1967) 이상문학상(1978) 대한민국문학상(1986) 대산문학상(1994) 21세기문학상(1998) 등을 수상했다.

▼학술 부문▼

“제대로 된 고전 연구는 참나무 숲과 같습니다. 참나무 숲은 비옥한 토양을 조성해 그곳에 200종이 넘는 식물이 함께 자랄 수 있도록 하죠. 지금까지 학계의 비옥한 토양 마련을 위해 노력해왔고 인촌상은 그런 작업에 대한 큰 성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내 학계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의 대부로 존경받는 박종현(朴琮炫·69.사진)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30년 넘게 플라톤의 저서에 매달려 그리스어 원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해 왔다.

박 교수가 ‘천혜비경’이라고 감탄한 그리스 철학에 국내 학계가 마치 ‘오지’라도 되는 듯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이유는 언어장벽 때문이었다.

“영어에 ‘그 말은 내겐 그리스어다’란 표현이 있습니다. 도무지 못 알아듣겠다는 뜻인데 그만큼 어려운 언어죠.”

일본어 번역판에 의지하는 쉬운 길도 있었다. 하지만 박 교수는 일본어를 통해 서구의 학문을 접하는 일이 마뜩잖아 일본어를 의도적으로 배우지 않았다.

막막한 그리스어와의 대면은 힘들었던 만큼 결실도 알찼다. 무엇보다 2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빛을 잃지 않는 철인(哲人)의 지혜를 원어로 접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다.

“플라톤은 ‘대화’의 마지막 편인 ‘법률편’에서 나라가 잘 되려면 자유 우애 지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자유가 있지만 계층, 세대가 분열돼 있으니 우애는 부족하지요. 나라 곳곳에 숨은 지성들은 많습니다. 치자(治者)가 할 일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릴 사람들을 선정하는 것입니다. ‘코드’를 따질 것이 아니라 숨어 있는 지성을 최대한 동원해 나라를 이끌어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박 교수는 “지금까지 해 온 일보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는 말로 수상소감을 마무리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박종현씨 공적사항:

2000년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97년 플라톤의 ‘국가’ 역주서 등 그리스 철학 원전들을 꾸준히 한국말로 옮겨 왔다.

고대 그리스 철학 연구자인 조요한 전 숭실대 총장은 박 교수의 ‘국가’ 역주서에 대해 “일본에서 출간된 두 종의 ‘국가’ 번역보다 훨씬 낫다”고 평가했다. 지금까지 플라톤 전집의 30%가 넘는 분량에 대해 연구서를 내놓아 한국에서 서양 고대 철학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번역서와 역주서 외에 저서로 ‘헬라스 사상의 심층’ 등이 있다.

▼제17회 인촌상 심사위원▼

▽교육 부문 △위원장=박영식(朴煐植) 광운대 총장 △위원=한상복(韓相福) 서울대 명예교수, 최정훈(崔正薰) 연세대 명예교수, 이초식(李初植) 고려대 교수

▽언론출판 부문 △위원장=신일철(申一澈) 고려대 명예교수 △위원=유재천(劉載天) 한림대 한림과학원장, 이종석(李種奭) 전 동아일보 논설실장, 김경희(金京熙) 지식산업사 대표

▽문학 부문 △위원장=여석기(呂石基) 고려대 명예교수 △위원=정명환(鄭明煥) 전 서울대 불문과 교수, 박완서(朴婉緖) 작가, 황동규(黃東奎) 서울대 명예교수

▽학술 부문 △위원장=이호왕(李鎬汪) 학술원 회장 △위원=김태길(金泰吉) 학술원 부회장, 김동기(金東基)고려대 명예교수, 양승두(梁承斗) 연세대 명예교수, 안휘준(安輝濬)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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