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정부 명성황후 시해 개입 물증 111년 만에 ‘햇빛’

  • 입력 2006년 6월 5일 03시 00분


조선과 관련된 문제에 전권을 위임받았던 이노우에 가오루(왼쪽). 당초 명성황후에 대한 회유책을 제시했던 그는 일본 각의의 의견을 받아들여 명성황후 시해를 수행할 자신의 후임자로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오른쪽)를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과 관련된 문제에 전권을 위임받았던 이노우에 가오루(왼쪽). 당초 명성황후에 대한 회유책을 제시했던 그는 일본 각의의 의견을 받아들여 명성황후 시해를 수행할 자신의 후임자로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오른쪽)를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잠들어 있다가 일본 군대의 호위를 받은 낭인들의 급습으로 참변을 당한 경복궁 내 옥호루. 동아일보 자료 사진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잠들어 있다가 일본 군대의 호위를 받은 낭인들의 급습으로 참변을 당한 경복궁 내 옥호루. 동아일보 자료 사진
“정말로 무서운 것을 찾아냈다. 일본인으로서는 짐작은 했지만 찾아내기는 힘든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돼 있다.”

일본 정부가 명성황후 시해에 직접 개입했음을 방증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육군대장과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외상 사이의 편지를 보고 고야쓰 노부쿠니(子安宣邦·정치사상사) 일본 오사카(大阪)대 명예교수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 지난달 중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세계석학초청강좌에 초대된 고야쓰 교수는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가 일본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낸 이 편지의 해독에 큰 도움을 줬다. 한자학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일본 메이지시대의 한문서체를 전공한 일본인 학자들을 동원해 그 뜻을 명확히 규명해 줬다.

▽‘1895년 7월 8일’의 의미=이 편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편지가 쓰인 시점. 1895년 7월 8일은 일본 정부의 정책이 회유책에서 강경책으로 전환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확보했다고 자신했던 일본은 1895년 4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3국 간섭’으로 랴오둥(遼東) 반도를 되돌려 줬다. 이를 지켜본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배격하는 ‘인아거일(引俄拒日)’책으로 돌아서 5월 13일 친일파의 거두인 군부대신 조희연을 파면한 뒤 28일에는 친일 성향의 2차 김홍집 내각을 해체하고 친러파를 대거 기용했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주한 일본공사는 본국 정부와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6월 20일 귀국했다. 이처럼 일본에 불리한 상황은 7월 8일 직전에 반전한다. 7월 5일 아오키 슈조(靑木周藏) 주독일 일본공사가 ‘독일의 이탈로 3국 연합은 매장만 안 된 시체’라고 보고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신정변(1884년)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이노우에의 압력으로 갑오개혁(1894년) 때 내무대신에 임명된 박영효가 7월 6일 역모사건으로 실각했다는 보고가 접수됐다. ‘내외(內外)에 대해 방관 좌시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편지글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편지 속 인물들=이 편지에는 메이지시대의 3대 거물 정치인이 등장한다. 편지를 쓴 야마가타는 메이지 유신의 공신으로 일본 육군의 창설자이자 1889∼91년 총리를 지낸 거물로 일왕의 자문에 응해 막후에서 국사를 좌지우지한 겐로(元老)였다. 당시 일본 정치는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山口 현) 출신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그리고 편지 속 세외(世外) 백작으로 등장하는 이노우에가 겐로 역을 맡고 있었다. 특히 이노우에는 직함은 국장급인 공사였지만 이토와 영국 유학을 같이 다녀온 친구 사이로 1차 이토 내각의 외상, 2차 이토 내각에서 내상을 맡은 인물이었다.

형식상 이노우에의 상관이자 편지를 받은 무쓰 외상은 이노우에가 외상을 맡았을 때 전격 발탁한 인물이다. 무쓰는 그해 6월 5일부터 폐병으로 도쿄 인근 오이소(大磯)에서 요양 중이었다.

▽편지의 재구성=일본의 역사소설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는 ‘민비 암살-조선왕조 말기의 국모’라는 책의 결론에서 무쓰 외상이 동향 후배로 시해사건에 가담했던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가 보낸 편지를 읽고 비로소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알았다며 “아무리 자유로운 상상력의 날개를 펼쳐도 일본 정부와 이 사건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마가타의 편지의 내용을 볼 때 무쓰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에 모종의 강경책을 제시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야마가타가 편지에서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각의에서 결정되는 대로 단행하시기를 희망한다”고 쓴 것은 무쓰의 강경책에 동의한 것이라는 게 최 교수의 해석이다.

이 문장에 우리말 존대어미 ‘시’에 해당하는 어(御)가 쓰였는데 최 교수는 이를 두고 “한국 문제에 전권을 지니고 있던 이노우에가 일을 단행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이노우에는 무쓰보다 여덟 살, 야마가타보다 두 살이 더 많다.

이노우에는 귀국 직후 조선 조정에 300만 엔의 기증금을 주는 방식으로 명성황후를 회유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는 일본 내각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는 제안이었고 편지는 이노우에가 각의 결정을 받아들여 강경책으로 선회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일본 각의가 사실상 명성황후 제거 결정을 내린 때를 바로 이 시점으로 보고 있다. 기증금안을 제시했던 이노우에가 문제의 편지가 쓰인 7월 8일 직후에 돌연 자신의 후임으로 동향의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 최고 전문가로 ‘백의종군’에까지 나섰던 이노우에가 긴박한 시기에 외교의 문외한인 미우라를 후임으로 추천한 것은 손에 피를 묻히는 일에는 자신보다 ‘칼잡이’가 적격이란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최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자료를 보완해 곧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지식산업사)의 완결판을 출간할 예정이다. 2004년 일역판(사이류샤·彩流社)이 나왔던 이 책은 현재 영역 작업도 진행 중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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