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동시에 그랑제콜(Grandes Ecoles) 합격.’
프랑스인이라면 누구나 눈을 크게 뜨고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영예로운 일이다.
최근 재프랑스 교포 2세인 나호연(20), 호영(19) 씨 형제가 이 같은 진기록을 세우면서 교민 사회를 넘어 프랑스 주류 사회에 화제를 낳고 있다.
형인 호연 씨는 프랑스 3대 상경계 그랑제콜 가운데 하나인 파리고등상업학교(ESCP)에 호영 씨는 그랑제콜의 최고봉인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각각 합격했다.
이중국적자인 호영 씨는 프랑스인 쿼터로 뽑힌 최초의 한국인 합격생으로 알려졌다. 외국인끼리 경쟁한 게 아니라 최고를 달리는 수많은 프랑스 학생과 당당하게 겨뤄 영광을 안은 것이다.
그랑제콜이 과연 무엇이기에 그토록 화제가 되는 것일까.》
프랑스는 고등교육이 평준화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프랑스야말로 ‘대학 위의 대학’인 그랑제콜을 통해 세계에서 유례없는 엘리트 교육을 실시하는 나라다. 톱클래스의 그랑제콜 합격은 동시에 프랑스의 상류사회 진입 티켓을 손에 쥐는 것을 의미한다.
두 형제의 입학기를 들어보면 프랑스가 엘리트를 키우는 데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이는지 알 수 있다.
▽엘리트 교육은 고교 때부터=엘리트를 선발하는 과정은 고교 때부터 시작된다. 그랑제콜에 응시하기 위해선 고교를 졸업한 뒤 ‘프레파’로 불리는 준비학교에 진학해야 한다. 프레파 입학생은 고교 내신성적으로 선발한다.
고교 졸업생 80만 명 가운데 프레파 진학생은 10% 미만. 호연 씨가 입학한 ‘장송 드 사이’와 호영 씨가 공부한 ‘생 주느비에브’는 프레파 중에서도 고교 최상위권 학생만 선별해서 입학시키는 학교다. 지방 고교 출신은 전교 1∼3위에 들어야 응시라도 해 볼 수 있을 정도다.
프레파에서의 경쟁은 살벌하기 그지없다. 모두 그랑제콜 합격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호연 씨는 “우리 반 37명 가운데 그랑제콜에 합격한 학생은 20명 정도이며 7명은 재수를 하고 나머지는 중도 포기했다”고 전했다. 호연 씨도 재수를 거쳐 이번에 합격했다.
호영 씨는 “우리 학교는 ‘두더지 반’으로 불린다”고 말했다. 공부 때문에 시력이 나빠지는 학생이 많아 생긴 별명이다. 호영 씨의 프레파는 1학년을 끝낸 뒤 우열을 가려 ‘에투알(별)’이라는 우등반을 별도로 구성한다. 단계별로 최고의 엘리트를 솎아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엘리트를 인정하는 사회=호영 씨는 9월부터 내년 4월까지 군사훈련을 포함한 리더십 프로그램을 거친다. 나머지 3년 동안에도 공부와 현장 경험을 반복한다. 호영 씨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합격하는 동시에 공무원 신분이 되므로 매달 700유로(약 85만 원)가량의 월급을 받는다.
호연 씨는 2학년까지 마친 뒤 기업체에서 14개월의 인턴십을 거쳐야 졸업할 수 있다. 단순한 현장 실습이 아니라 제대로 임금을 받고 팀장급 실무를 수행한다. 그랑제콜이 이처럼 현장 교육을 강조하는 것은 리더가 되려면 현장을 알아야 한다는 국가 방침 때문이다.
졸업생들은 대개 20대 중반의 나이에 고위 공무원이나 기업체 간부급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일반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과는 차원이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
전자부품 사업을 하는 아버지 나상원(49) 씨는 “거래처의 직원들이 그랑제콜 출신의 나이 어린 상관을 모시면서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으므로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점에 놀랐다”고 전했다.
이처럼 대부분의 프랑스인은 그랑제콜 출신자를 우대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엘리트를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 덕분에 ‘평준화 교육’의 상징인 프랑스에서 엘리트 교육이 존속되며 이는 곧 높은 국가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파리=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
▼입학문제 상상초월…수돗물 틀어놓고는 “이야기 해보라”▼
국가를 이끌 인재를 선발하는 과정에 걸맞게 그랑제콜 입시의 난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1월에 원서를 내고 4월 중순에 2, 3주 동안 필기시험을 본다. 합격자는 6월 중순부터 구두시험을 치른다. 힘든 입시에 시달린 학생들은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호연 씨는 필기시험으로 수학 역사 철학 영어 등 모두 7과목을 치렀다. 5개 학교에 복수 지원해 시험을 치르는 데만 3주가 걸렸다. 시험 형식은 비슷하다. 과목별로 한 문제가 출제됐으며 문제별로 A4용지 9쪽 분량의 답안을 작성했다.
시험 문제는 단답식과는 거리가 멀다. 호연 씨가 치른 철학시험 문제는 ‘누구의 잘못인가’라는 질문이 전부였다. 역사시험 문제도 ‘1950년대 이후의 소비와 소비자’라는 질문만 주어졌다. 호영 씨가 본 프랑스어 문제는 ‘행복을 원해야 하느냐’였다.
호연 씨는 “나름대로 문제에 대한 세부 주제를 정한 뒤 그동안 배운 내용을 토대로 창의적인 생각을 전개하는 과정이 까다롭기 그지없다”고 설명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물리시험에선 ‘레이저’라는 화두만 주어졌다. 호영 씨는 광, 파동 등 2년간 배웠던 물리 이론을 총동원해 답안을 작성했다.
구두시험은 더욱 어렵다. 수학시험 문제도 채점관과 대화를 나누며 구두로 풀어야 한다. 채점관은 정답을 맞히느냐가 아니라 정답을 이끌어 내는 과정을 평가한다.
호영 씨가 치른 물리 구두시험은 밑도 끝도 없었다. 채점관은 수도꼭지 아래에 컵을 놓고 꼭지를 틀더니 대뜸 “이야기해 보라”고만 말했다. 호영 씨는 “수도꼭지 안에 있을 때의 물의 상태, 물이 흘러내릴 때의 팽창 등 물리 지식을 총동원해 채점관과 대화를 나눴다”고 설명했다.
파리=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