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양오염 전문가인 광주과학기술원 김경웅(환경공학과 교수) 국제환경연구소장은 지난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색다른 제안을 받았다. 유럽의 분쟁지역인 코소보의 중금속 오염 실태를 조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 세계 최악의 납 오염지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WHO에서 나왔습니다. 난민촌 환경을 조사하려고요.”
1월 27일 김 소장이 코소보로 들어가는 길은 시작부터 긴장감이 맴돌았다. 미트로비차 지역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 헬멧을 눌러쓰고 손에는 자동소총을 든 병사가 다가와 김 소장이 탄 지프를 멈춰 세웠다.
방문지인 미트로비차는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 세르비아 내 소수민족 알바니아인의 90%가 모여 사는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가 다수를 차지하는 유일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코소보 독립을 두고 한때는 이웃사촌이었던 주민들이 수년째 둘로 갈려 갈등을 빚고 있다. 최근 이 지역은 최악의 납 오염에 몸살을 앓고 있다.
미트로비차 시내에 들어선 김 소장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깜짝 놀랐다. 야트막한 야산 높이의 중금속 가루 더미가 시내 곳곳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던 것이다. 언제든 바람만 불면 날아갈 태세였다.
“마스크를 써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두려울 정도예요. 일단 바람이 불면 노천에 방치된 중금속 가루는 삽시간에 인근 지역으로 날아가죠.”
1990년대 유고연방이 해체되기 전만 해도 이 지역은 대표적인 광산지대로 손꼽혀 왔다. 그러나 연방 해체와 함께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중금속 가루가 노천에 그대로 방치된 것이다.
○ 최대 피해자는 집시 아이들
납 오염의 최대 피해자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6000여 명의 집시다. ‘떠도는 사람들’로 불리는 집시의 거주 환경은 1960년대 한국의 판자촌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특히 집시 아이들은 중금속 오염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그곳 아이들 중에는 유난히 또래보다 키가 작고 왜소한 아이가 많아요. 아이들이 갖고 노는 흙에 있는 납이 영향을 미친 겁니다.”
중금속인 납에 노출된 아이들은 심각한 발육 장애를 겪는다. 코와 피부를 파고드는 납 성분은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 노약자에겐 치명적이다. 김 소장은 아이들이 놀 만한 놀이터와 골목 구석구석에서 토양 샘플을 채취하기로 했다. 김 교수가 한 집시 난민촌에서 가져와 분석한 토양의 납 오염도는 WHO가 정한 기준보다 100배나 높았다.
조사팀이 도시 안팎을 조사하는 동안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주민들도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지역의 의사들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죠.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주민들만 상대하다 보니 모두 건강하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이번 조사에 김 소장을 끌어들인 사람은 WHO 유럽사무소 환경보건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록호 박사였다. 김 박사는 코소보를 다녀온 의사들을 통해 이 지역의 심각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서울 사당의원 원장으로 재직하던 1990년대 초 원진레이온에서 직업병 환자가 발생하자 진상 규명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런 그의 눈에 수년째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비소 오염 연구를 해오던 김 소장이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사선 넘어 만든 보고서 3월 보고
김 소장은 지난해 비소 오염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메콩 강 일대의 오염 지도를 완성했다. 지금도 김 소장은 납이나 카드뮴, 비소 같은 중금속에 오염된 지역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김 소장이 미트로비차에 머무는 동안 시료 채취는 4일간이나 계속됐다.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주민 간에 언제 총격전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도 계속됐다.
이달 초 그 결과를 분석한 보고서에는 미트로비차의 참혹한 현실이 속속들이 적혀 있다. 미트로비차 집시 난민촌의 납 오염은 국제 기준보다 최소 5.5배, 최대 125배나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 보고서는 이달 말 WHO에 보내져 국제사회의 대책 마련에 근거로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 김 소장도 이 결과를 들고 다시 코소보로 향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제는 진짜로 대책을 세워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