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피맛골… 땅거지… 600년 서울 파노라마

  • 입력 2008년 5월 10일 02시 58분


◇서울은 깊다/전우용 지음/392쪽·1만8000원·돌베개

‘땅거지’라는 말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조선시대에 노비는 재산이었다. 거지를 거리에 방치하는 건 재물을 길에 내다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거지가 늘었다. 조선 왕실은 서울 거리의 거지를 거둬 노비로 삼으라는 대책을 내놓고 거지들이 본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거지들은 서울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지방에서 굶어죽느니 서울에서 거지로 지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

서울 거지들은 주로 다리 밑에서 지냈는데, 영조 때 개천 바닥에서 퍼 올린 흙을 청계천 오간수문(다섯 칸짜리 수문) 양쪽에 쌓아두었더니 거지들이 이 산에 땅굴을 파고 살았다. ‘땅거지’의 유래다.

이 책엔 이처럼 흥미로운 서울의 역사가 가득하다. 서울의 궁궐, 주요 건축물뿐 아니라 풍습, 문화, 교통, 생태, 지리, 근대사 등 서울 600년의 역사를 다채롭게 살핀다. 저자는 서울학연구소에서 10여 년 서울사(史)를 연구한 전우용 서울대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다.

고대, 중세의 주요 도시에는 으레 대규모 군중이 모여들어 즐기는 행사 공간이 있었다. 신라 경주에도 고려 개경에도 사찰과 탑이 많아 연등회 때 온갖 백성이 모여들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있었던 일본 에도(옛 도쿄)에는 가부키좌(일본 전통극 가부키의 공연장)가 있었고, 중국 베이징에는 경극장이 있었지만 유독 조선 초기 서울에만은 그런 장소가 없었다. 유교 이상을 실현하려 한 정도전이 수도에서 종교적 색채를 빼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겨난 서울. 역사가 잘 보존된 곳은 길이 좁고 구불구불하다. 종로구 피맛골은 미로를 방불케 할 정도. 애초 서울은 계획 도시였지만 실패했다. 천도 뒤 길을 닦기 전에 개경에 살던 고관대작들이 옮겨오면서 택지를 나눠 가졌고 이 집들 좌우에 작은 집이 어지러이 들어선 탓이다.

1898년 종로에 전차 궤도가 부설될 때 이야기도 재미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고종이 시해된 명성황후를 그리워해 홍릉(당시 청량리에 있었음)에 능행(陵幸)을 되풀이했고 전찻길을 놓으면 능행이 간편해질 것이라는 미국인들의 꾐에 넘어갔다는 말을 퍼뜨렸다. 지금은 이런 얘기가 통념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저자는 명성황후가 홍릉에 안장된 때가 1897년 11월이고 전차를 부설하기 위한 한성전기회사가 1898년 2월에 생겼는데 불과 석 달 사이 능행이 엄청난 경비를 낭비할 만큼 잦을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또 능행은 국왕이 실존을 알리려는 과시 퍼레이드인데, 고종이 이를 몰랐을 리 없음을 간파한다.

여담처럼 썼지만 연인이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이별하게 된다는 얘기에 대한 저자의 ‘역사적 추정’도 재미있다. 저자는 “확실치는 않다”면서도 “1927년 생긴 경성재판소(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혼 소송이 진행됐다는 것과 배재학교 이화학교 학생들이 정동 입구로 나란히 들어가다가 정동교회 앞에서 헤어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설득력 있다”고 전한다.

책 곳곳에서 서울에 켜켜이 쌓인 시간, 사람, 공간의 흔적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묻어난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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