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추사는 글씨와 바꾸고 다산은 친구에게 조르고…

  • 입력 2009년 6월 25일 02시 55분


‘한국의 차 문화’ 시리즈
1차로 조선후기 글 번역

18세기 조선의 한양, 달빛 은은한 깊은 밤. 불법을 저지른 어느 관료 집 인근에 감찰(현재의 감사원 직원)들이 속속 모였다. 감찰들은 그 관료의 죄를 하얀 판자 위에 낱낱이 적고 관료의 집으로 몰려가 문 위에 판자를 걸었다. 재빨리 가시나무로 문을 봉하고 감찰들의 서명을 남긴 뒤 어디론가 흩어졌다. 그 관료는 금고(禁錮) 처분을 받은 것이다.

감찰들은 비위 관료를 처벌하기 전 모인 자리에서 함께 차를 마셨다. 폭풍 전의 고요가 느껴졌을 것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다시(茶時)’라는 글에서 이를 야다시(夜茶時)라고 불렀다고 소개했다. 그는 “야다시라는 한마디 말이 여항(閭巷)에서 잠깐 사이에 남을 때려잡는 말로 전해지고 있으니, 아! 국가 전통의 아름다운 풍속을 언제 다시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 관료를 처벌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겼다는 게 이채롭다.

조선 후기 차 문화 관련 문헌을 모아 번역한 ‘한국의 차 문화 천년’(돌베개)이 24일 나왔다. 1권은 차와 관련한 시, 2권은 산문을 담았다. 이 시리즈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의 차 문헌을 집대성(전 6권)할 계획이다.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 유홍준 명지대 교수 등 학자 6명이 참여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친구 권돈인(1783∼1859)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리산 차를 극찬했다. 추사는 지리산 승려들이 이 차를 쉽게 내주지 않는다며 “그 사람(승려와 추사를 연결시켜준 사람)이 내 글씨를 매우 좋아하니, 상황을 봐가며 서로 교환하는 길도 있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추사가 자신의 글씨로 차를 샀음을 알 수 있다.

추사가 차를 어찌나 좋아했던지 잘 알고 지낸 초의선사(차의 명인·1786∼1866)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스님을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도 못하고 쉽사리 부숴버리지도 못해 또 이렇게 차를 보내달라고 조르게 되오”라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차를 만드는 승려 혜장(1772∼1811)에게 “가만히 아뢰노니, 고통이 많은 이 세상 중생을 제도함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보시를 베푸는 일이며, 이름난 산의 좋은 차를 몰래 보내주는 것이 상서로운 일이라오”라고 썼다.

차의 효능을 건강법에 활용하기도 했다. 실학자 안정복(1712∼1791)은 ‘수다설’(漱茶說)에서 “식사가 끝날 때마다 진하게 우린 찻물로 입 안을 헹궈 찌꺼기나 기름기를 가시게 하면 비위가 상하는 줄 알지 못한다. …이가 점점 단단해져 충치가 절로 낫는다”고 말했다.

차 수요의 증가로 품귀 현상이 발생해 가격이 올라가기도 했다. 문신 신광수(1712∼1775)는 지인에게 편지를 보내 “작년에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은 차가 귀해서 15잎에 10전이나 받으니 차가 몽땅 떨어져 속쓰림병에 괴롭던 터였습니다”라고 썼다.

궁중의 차 애호 문화도 엿볼 수 있다.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했으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효명세자(1809∼1830)는 세자로서는 드물게 차에 관한 시를 남겼고 문신 조병현(1791∼1849)의 문집에는 임금과 신하가 차를 달이며 함께 지은 시가 실렸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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