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만㎡ ‘숨은물 벵듸’엔 숨은 신비 한가득

  • 입력 2009년 9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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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고산지역 습지 탐방
람사르 습지 ‘물장오리’ 60배 면적… 제주 최대 규모
“습지는 생태계 콩팥”… 한라산 희귀 동식물 모여 있어

“우와, 노란색 잠자리다.” 습지 탐방객이 탄성을 질렀다. 19일 오후 한라산 1100고지 휴게소 서북쪽 ‘숨은물 벵듸’ 습지. 노란 실잠자리가 수초 속에서 짝짓기에 한창이다. 옆에는 몸 색깔이 파란 실잠자리도 날갯짓을 쳤다. 습지에 들어간 순간 스펀지처럼 발이 푹푹 빠졌다.

이곳은 물이 숨어있는 넓은 들판(벵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습지. 그동안 학술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은 채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국유지인 이 습지 면적은 어림잡아 70만 m²(약 21만1700평). 지난해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제주시 물장오리 습지면적 1만2270m²(약 3700평)의 60배에 가깝다. 제주지역 최대 규모 습지로 삼나무 조림지, 활엽수림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1100고지 휴게소에서 500m가량 떨어져 있지만 길이 없다. 전문산악인과 동행해 제주조릿대 숲을 헤맨 끝에 습지를 찾았다. 제주 특산식물인 한라부추가 보라색 꽃을 활짝 피웠다. 곰취는 기온이 낮아진 탓인지 어느새 노란 꽃이 시들었다. 기장대풀이 군락을 이룬 습지에 발을 들여놓자 인기척에 놀란 듯 온갖 풀벌레가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참개구리도 폴짝 뛰며 물속으로 몸을 숨겼다. 연못 형태의 작은 습지가 3곳 형성됐다. 큰고랭이 송이고랭이 등 수생식물이 자리 잡았다.

해발 950m에 위치한 습지 주변에는 오름(기생화산) 3개가 연결된 삼형제오름을 비롯해 살핀오름, 노로오름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빗물과 한라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였다가 다시 개울을 따라 흘러내린다. 제주시 창고천의 원류이기도 하다. 김양보 제주도 환경정책과장은 “습지에 대한 연구와 보존사업이 시작단계에 있다”며 “숨은물 벵듸는 규모, 종 다양성 등에서 상당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고 람사르 습지 등록을 위한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고 말했다.

제주지역 습지는 내륙습지에 포함되지만 고지대 화산분화구나 분지에 물이 고여 형성된 특징을 보인다. 습지 토양과 서식 식물은 부유물질과 질소, 인을 제거해 깨끗한 물을 제공한다. 식생이 풍부한 습지는 대기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저장하는 기능도 있어 ‘자연의 콩팥’으로 불린다.

한라산 해발 600m 이상 고산습지는 백록담 화구호를 비롯해 물장오리, 어승생, 사라오름, 동수악, 소백록담, 1100고지 습지 등이 분포돼 있다. 이 가운데 1100고지 습지는 다양한 생물상을 보여 올해 말 람사르 습지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1100고지 습지는 면적이 10만3172m²(약 3만1200평) 규모로 멸종위기종인 자귀땅귀개를 비롯해 희귀종인 한라물부추 등 250여 종의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다.

지난해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물장오리(해발 900m)는 분화구에 형성된 대표적인 습지. 큰고랭이, 골풀 등의 식물이 군락이 이루고 있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식물인 산작약, 멸종위기곤축인 왕은점표범나비, 물장군 등도 서식한다. 한라산을 만든 여신인 ‘설문대할망’이 빠졌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로 정확한 수심이 측정되지 않았다. 연중 물이 마르지 않는다.

제주도 환경자원연구원 고정군 박사는 “제주 고산습지는 기후변화를 눈으로 쉽게 확인할 최적의 장소로 평가 받는다”며 “습지에 대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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