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채문식 전 국회의장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6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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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官-學-언론계 두루 거치며 온건-합리論지향

26일 86세를 일기로 타계한 채문식 전 국회의장은 광복 직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역사 현장의 한복판을 지켰으며 관계와 정계 언론계 학계 교육계를 오가며 누구보다도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합리적이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고인은 ‘영원한 비주류, 만년 야당’을 자처했고, 그만큼 삶의 굴곡도 많았다.

일제강점기 말 경성제국대 예과 학생이던 그는 좌익 서적을 탐독한 혐의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됐다 풀려나 일제의 감시를 받던 중 광복을 맞았다. 곧 이은 해방정국에서 좌우 대립이 격화되자 경성대(서울대의 전신) 학생 대표로 신탁통치반대 투쟁에 앞장서며 우익학생운동을 주도했다.

23세에 고향인 경북 문경군수로 부임해 아버지의 친구들을 면장으로 거느린 청년군수를 지냈고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 재정과장을 지냈다. 5·16군사정변 후 공직을 떠나 영남일보 논설위원과 명지대 교수 등으로 학계와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 정계 입문을 노렸으나 여러 차례 낙선의 아픔을 겪었다. 공화당의 영입 제의도 거부하고 야당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1971년 야당인 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들어가 당 대변인을 했지만 양김(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이 주도하는 야당에서도 그는 여전히 비주류였다. 선명성을 강조하는 야당에서 온건론자인 그가 설 자리는 좁았다.

결국 1980년 5공화국이 출범하자 야당생활을 접고 여당인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했다. 전두환, 노태우 정부를 거치며 국회의장과 집권당 대표를 지냈지만 야당 때와 마찬가지로 핵심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장이면서도 1987년 헌법개정을 둘러싼 논란의 밖에 있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후계자로 낙점했을 때도 그는 반기를 들었다. 고인은 생전에 자신의 정치 이력에 대해 “나는 핵심과 주류에서는 항상 비켜서 있었다. 집권당 대표를 맡았지만 아무 실권도 없는 명예직 감투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결국 13대 국회를 마지막으로 정치를 떠난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유화적인 대북정책과 언론사 세무사찰 등에 반대해 각계 원로들과 시국선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중앙고보(중앙고 전신)를 졸업한 고인은 중앙고와 고려대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과 고교시절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고 평생 인촌 선생을 삶의 좌표로 삼았다.

유족으로는 경철(KAIST 교수) 경호(우영유압 대표) 경탁 씨(사업) 등 3남과 딸 경원 씨, 사위 박을영 씨(사업)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국회장으로 치러지며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02-2072-2091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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