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준비생 이현경 씨(가명)는 2년 전 그날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 휴대전화 제조업체 면접장에서의 일이다.
“아버지가 안 계시느냐는 질문에 ‘이혼하셨다’고 답했더니 ‘부모님이 왜 이혼을 했냐’고 묻더군요.”
생전 처음 받아본 질문에 당황한 이 씨는 “아버지가 외도 문제가 있으셔서…”라고 했다. 면접관은 다시 “언제 이혼했냐”고 물었고 이 씨는 “제가 중학교 때”라고 답했다.
“중학교 때면 별로 상처 안 받았겠네. 그래도 그런 일 겪고 나면 남자 못 믿게 되지 않나? 우리 회사 남자 직원들 많은데 잘 지낼 수 있어요?”
이 씨는 주변의 남자친구들을 거론하며 “공과 사는 구분한다”고 답했지만 말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다시 면접관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현경 씨. 지금 눈물 흘리려는 거 같은데…. 그것 봐, 눈물 흘리잖아. 이 상황을 이기지 못하는 거잖아요. 그래 가지고 사회생활 하겠어요?”
이 씨는 눈물을 머금고 면접장을 나왔지만 그날 일은 그에게 깊은 상처가 됐다. “이후로 면접을 네 번 더 봤는데 혹시라도 그 질문이 나올까봐 자꾸 위축이 돼요. 얘기를 잘하다가도 부모님 관련한 질문이 나오면 자꾸 말이 꼬이고….”
서울의 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취업준비생 김영준 씨(가명)는 23일 기자에게 일기장을 보여줬다. 지난해 12월 국내 최대 규모의 인터넷 다운로드 업체에서 면접을 본 날 쓴 일기였다. “나라는 인간이 한없이 비참하다. 정말 열심히 해서 언젠가 면접관이 되면 나는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그날 김 씨가 만난 면접관 8명 중 4명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회사에 입사하면 누가 제일 갈굴(괴롭힐) 것 같아요?” “누가 제일 일 못하게 생겼어요?”
‘군대에서 신병을 괴롭힐 때나 나올 질문’이라는 생각에 김 씨는 기가 막혔다.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면접. 가운데 앉아 있던 면접관이 담배를 끄며 말했다. “김영준 씨, 안 뽑을 테니 나가 보세요.”
청년백수 35만 명 시대. 기업 면접장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본보는 회원수 128만 명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인터넷 취업카페인 ‘취업 뽀개기’를 통해 설문조사를 했다. 설문에 응시한 386명 가운데 63%인 241명이 면접 도중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 중 인격적인 무시를 당했다고 답한 비율이 37%로 가장 많았고, 면접관이 성추행으로 느껴지는 언행을 하거나 성차별적인 발언을 했다고 답한 사람도 19%에 달했다.
영업직에 지원한 여성 구직자는 “영업을 하려면 술자리에서 고객의 비위를 잘 맞춰야 하는데 남자를 다룰 줄 아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여성 지원자를 일으켜 세워 모델워킹을 해보라고 시키는 사례도 있었다. 문제가 된 기업 관계자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압박면접을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압박면접은 지원자의 약점을 파고들어 발언의 진위를 검증하고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자질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보국이 첩보원을 선발하려 만든 이 방식이 미국 금융가에서 주로 쓰였다.
취업 컨설팅업체인 ‘커리어 코치’ 윤영돈 소장은 “한국 기업들도 지난 10여 년간 압박면접을 해왔다”며 “사생활 침해와 성차별 관행에 관대한 우리문화의 특수성이 녹아들다 보니 압박면접이라는 이유로 인권이 침해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압박면접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고 평가받는 한국얀센. 이 회사는 매년 채용 절차가 시작되기 전 면접관을 대상으로 3차례에 걸쳐 면접 교육을 진행하고 지원자를 논리적으로 압박하는 자체 매뉴얼도 개발했다. 면접관들끼리도 서로 교차 평가하는 제도를 도입해 인권 침해 소지를 최소화했다.
한국얀센 오경아 이사는 “면접관 교육을 할 때 외모나 학력, 가정사 등 직무능력과 무관한 부분은 건드리지 않도록 가이드라인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신과 전문의가 면접에 참여하기도 한다.
건국대 의대 신경정신과 하지현 교수는 “압박면접 자체가 고도의 심리적 과정이기 때문에 면접관들이 일반 면접보다 훨씬 심도 깊게 준비해야 한다”며 “압박을 통해 무엇을 검증할 지를 분명히 설계하지 않으면 압박면접이 모욕면접으로 전락하기 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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