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는 ‘무소유’의 사찰…‘법정 장사’ 그만 집어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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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일 18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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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 1주기2003년 7월말경 어느 날, 불일암에서 물 안개가 걷히고 있는 조계산을 물끄러미 지켜 보는 법정 스님의 뒷 모습. 글쓴이가 직접 촬영한 사진이다. 왼쪽의 후박나무는 스님이 1975년 초가을 불일암에 오신 직후 심은 것으로, 스님은 넉넉한 이 나무 그늘 아래 소박한 나무의자를 놓고 독서와 명상을 즐겼다. 스님의 화장된 육신 중 일부가 49재 후 이 나무 아래 뿌려졌다. 오명철기자 oscar@donga.com
법정 스님 1주기
2003년 7월말경 어느 날, 불일암에서 물 안개가 걷히고 있는 조계산을 물끄러미 지켜 보는 법정 스님의 뒷 모습. 글쓴이가 직접 촬영한 사진이다. 왼쪽의 후박나무는 스님이 1975년 초가을 불일암에 오신 직후 심은 것으로, 스님은 넉넉한 이 나무 그늘 아래 소박한 나무의자를 놓고 독서와 명상을 즐겼다. 스님의 화장된 육신 중 일부가 49재 후 이 나무 아래 뿌려졌다. 오명철기자 oscar@donga.com
‘무소유’의 법정 스님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1년이 됐다. 지난달 28일(음력 1월 26일) 오전 서울 성북동 길상사 극락전에서 조촐한 1주기 추모 법회(다례제)가 열렸다. 나는 유발(有髮) 상좌를 자처하며 20년 동안 스님을 모셔왔다. 그러나 스님 입적 후 길상사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상좌들이 눈에 밟힐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뭔가 말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길상사에 상좌들의 내분과 승속(僧俗)의 갈등이 ‘내연(內燃)’하고 있기 때문이다.

一. 발병에서 입적까지- “상좌 하나가 지옥 한 칸”

스님의 오른쪽 폐 뒤쪽에서 9cm가량의 종양이 발견된 것은 2007년 10월 23일이었다. 의료진은 “3~6개월밖에 못 사신다”는 진단을 내렸다. 스님은 “이 사실을 외부에 일절 알리지 마라”고 엄명했다. 곧바로 상좌들이 모였다. 설왕설래 끝에 스님을 미국의 저명한 폐암치료병원인 텍사스 휴스턴 MD 앤더슨병원으로 모시기로 했다. 11월 27일 미국으로 건너간 스님은 병원 인근에 조그만 집 한 채를 전세 내 100일 동안 방사선 항암치료를 받았다. 체중이 40kg까지 빠졌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상좌 일곱 중 어느 누구도 스님 곁을 지키지 못했다.

이 사이 절집에서 ‘일’이 벌어졌다. 한 상좌가 은사 스님 유고(有故)에 대비해 길상사 창건주 승계와 저작권 ‘확보’에 나선 것이다. 급기야 한 상좌가 미국으로 건너가 병석의 스님에게 “이러다 큰일 납니다. 창건주 승계서를 써주십시오”라고 매달렸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이는 “상좌가 부르는 대로 받아 쓴 스님은 펜을 바닥에 집어 던졌고, 그가 병실을 나가자 ‘내가 상좌를 잘못 뒀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2008년 3월 초 스님은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해 강원도 오두막으로 갔다. 병원 측은 “100% 회복됐다”고 했다. 3월 18일 모처럼 스님이 길상사에 왔다. 점심 공양을 맛있게 마친 스님은 덕조 등 세 상좌와 함께 경내에 개축 중인 명상수련원을 둘러보며 “호화롭지 않고, 지나치지 않게 하라”고 누누이 당부했다. 하지만 “아직 팔 힘이 없다”며 상량문 쓰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뤘다.

2008년 11월 스님은 사실상 자신의 마지막 저서인 ‘아름다운 마무리’를 냈다. 스님의 친필 서명이 들어 있는 책을 받아 든 순간, 나는 스님과 이별할 때가 멀지 않았음을 감지했다.

2009년 2월 길상사에서 동안거 해제 법회가 열렸다. 설법을 마친 스님은 작심한 듯 “10년 전 이 절을 만들 때 가난한 절을 내세웠으나 내가 이 자리에서 법문을 하고 나면 그 끝에 으레 불사를 내세워 돈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때마다 저는 몹시 곤혹스러웠다”고 했다. 스님이 주지실로 돌아오자 한 상좌가 쫓아 들어와 언성을 높였다. 미국에서의 치료비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며칠 뒤 스님은 출판사에 부탁해 선(先)인세를 받아 길상사 주지에게 건넸다. 얼마 뒤 스님은 길상사 소식지에 ‘재작년 겨울 신병을 치료하는데 제가 지닌 돈만으로는 모자라 부득이 사중(寺中·길상사)에서 치료비의 일부를 빌려 썼습니다. 그때 진 빚을 해제 사흘 후인 2월 12일 몇 사람이 입회한 자리에서 갚았습니다. 빚을 갚고 나니 이제는 아주 홀가분합니다. 그동안 내 치료비로 인해서 사중에 많은 신세를 지게 된 것을 이 자리를 빌려 밝힙니다.’

해제 법회 직후인 2월 말경 삼성서울병원에서 재검사를 받은 결과 암이 척추로 전이된 사실이 확인됐다. 이 와중에 2009년 3월, 맏상좌 덕조가 9년 만에 주지에서 물러나고 넷째 상좌 덕현이 6대 주지로 취임했다. 스님은 1983년 첫 상좌 덕조를 들인 이래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 덕일 등 상좌 일곱을 두었다. 2009년 5월 강원도에 기거하던 스님이 한때 위험한 고비를 만났지만 무사히 넘겼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이후 스님과 연락이 끊겼다. 상좌와 지인들을 통해 전해들은 바로는 스님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민간요법 등으로 투병생활을 계속하신다고 했다.

2010년 1월 15일 스님이 삼성서울병원 중환자실에 급히 입원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서둘러 병원으로 갔다. 스님은 곤고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너무나 수척한 모습이었다. 스님이 먼저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아무에게도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어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했다. 스님의 가늘어진 다리를 보니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불쑥 “그까짓 길상사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지금 생각해 보면 받지 않으실 걸 그랬다. 스님이 중요하지 절이 중요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친 김에 “스님께서 평소 상좌 하나가 지옥 한 칸이라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고도 했다. 그동안 하고 싶던 말이기도 했다. 스님께서 “허허” 하며 헛웃음을 지으셨다. 잠시 침묵 끝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해탈도 마시고, 큰스님도 되지 마시고, 법문도 마시고, 책도 쓰지 마시고, 그냥 편안히 지내시다 회향(回向)하세요”라고 말씀드렸다.

2010년 1월 23일 오후 다시 스님이 입원해 있는 삼성서울병원 20층 5호실에 갔다. 스님이 “한 번 왔다 갔으면 됐지 뭐 하러 또 왔느냐”고 대뜸 야단을 치셨다. 내심 섭섭했으나 고통이 심해 그러시는 거라고 이해했다. 스님은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가셨다. 스님의 신음소리가 계속 병실 밖으로 흘러 나왔다. 간병인이 병실에서 나올 때 산소마스크와 안대를 쓰고 누워 있는 스님의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렇게 스님과 작별했다.

二. 입적, 그 후 1년- “법정 장사를 집어치워라”

스님은 입적 당시 한 통의 유서를 남겼다. 입적 보름 전인 2월 24일에 서명한 것이다. 유서는 난산 끝에 작성됐고, 스님이 가까스로 서명하셨다고 한다. ‘남기는 말’과 ‘상좌들 보아라’ 등 2장으로 되어 있다.

‘남기는 말’에서 스님은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해 달라.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는 출간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상좌들 보아라’에서는 “덕조는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또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과 덕일은 덕조가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수행을 마칠 때까지는 물론 그 후에도 신의와 예의로 서로 존중하고 합심하여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이루고 수행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첫 번째 유언은 자신의 사후 논란의 핵심이 될 사안을 확실히 정리해 준 것이다. 자신에게 남은 모든 것을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에 준다는 의미이자, 사후 인세(印稅)로 인한 갈등과 분란의 싹을 자르겠다는 뜻이다. 스님의 말년을 정성으로 시봉했으나 상좌들과 신도들의 질시를 받은 어느 시인을 겨냥한 조치로 읽히기도 한다. 스님은 당초 저작권 관리를 시인과 ‘분당 보살’에게 위탁하려 했고, 주위 사람들은 이를 강력 반대했다. 스님의 와병 중에도 시인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책을 펴내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시인과 보살은 스님의 말년 2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이다. 스님은 시인의 책 만드는 열정과 솜씨를 높게 평가했고, 그가 스님께 바친 정성도 남달랐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스님을 ‘독점’하고자 했고 이로 인해 상좌 및 다른 신도들과 갈등을 빚었다.

두 번째 유언은 맏상좌 덕조에게 자중자애 할 것과 다시 한 번 기회를 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009년 봄과 가을 시인이 엮은 스님의 법문집 서문에는 덕조 등의 이름은 빠지고, 덕인 덕현 덕진 세 상좌와 시인의 이름만 올라 있다. 누구보다 스님을 잘 모셨고, 사랑도 듬뿍 받은 덕조가 맏상좌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덕조에 이어 길상사 주지직을 승계한 덕현까지 스님 1주기를 앞두고 길상사를 떠나버렸다. 이 또한 스님의 업(業)일 것이다.

스님은 1987년 공덕주 김영한 여사가 요정 대원각을 불교재단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8년 뒤, 스님은 청학 스님과 대도행 보살 등의 권유로 시주를 받아들였다. 스님은 대원각을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한 데 이어 1997년 ‘길상사’로 이름을 바꿨고, 2월 14일 청학 스님을 초대 주지로 1차 도량정비불사 회향식을 거행했다. 스님은 당시 “길상사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닌 공찰(公刹)”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스님의 병이 깊어지자, 상좌들은 조계종 총무원이나 본사인 송광사가 길상사를 ‘접수’할 것을 염려해 ‘창건주’ 승계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조계종 종법에 따라 창건주는 후임 주지를 임명할 수 있다. 한 상좌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미국으로 건너가 스님으로부터 ‘건강상 이유로 창건주 권한을 덕조에게 인계한다’는 문건을 받아왔다.

하지만 송광사 측에서 이를 인정해 줄 수 없다며 스님과의 ‘직접 면담’을 요구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급해진 덕조는 ‘무리수’를 두었고, 이 사실이 드러나 전격 교체됐다.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된 스님은 2009년 8월 27일 길상사 창건주를 ‘법정’에서 ‘송광사’로 변경하고, 사설사암에서 ‘공찰’로 전환토록 했다.

송광사는 종무회의를 열어 ‘길상사의 주지 추천권은 공찰이므로 종법에 의거하여 본사인 송광사 주지에게 권한이 있으나 창건주의 권한을 이양하고 길상사를 중흥시킨 공덕을 고려하여 법정스님 문도에서 문도회의를 거쳐 추천한 사람은 종법상 결격사유가 없는 한 송광사 주지가 이의 없이 총무원으로 주지 품신 하도록 한다’고 의결했다. 조계종은 9월 10일자로 길상사의 공찰 전환을 승인해 법적 절차를 완료했다.

나는 스님이 대원각을 받지 않았다면 훨씬 더 좋은 말년을 보내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님이 이 절과 인연을 맺는 바람에 청학 스님 등 승속(僧俗)의 ‘좋은 인연’들을 잃게 됐고, 상좌들도 ‘욕심’을 내게 됐다. 길상사는 법적으로 누구의 것이든,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무소유’의 사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깜’이 아닌데 단지 법정 스님의 문도라고 해서 길상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스님이 입적한 후 남긴 저서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출판사들이 무리해서 책을 더 찍어내고,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앞 다퉈 스님에 대한 신간을 냈다. ‘글 빚을 남기기 싫으니 책을 절판하라’는 스님의 유지는 출판업자들의 이해가 갈려 지난해 말에야 이행됐다. 마구잡이로 찍어낸 서책은 재고가 50만 권이나 됐다고 한다. 유묵전이 열렸고, 기념관 건립과 장학사업, 다큐멘터리 제작 등이 추진됐다. 1주기를 맞아 대 여섯 권의 신간이 더 나왔다. 다 부질없는 일이다. 제발 더는 법정 스님을 팔아 장사하지 말았으면 싶다.

三. 유지(遺志)- ‘맑고 향기롭고 자유롭게’ 산 대(大)자유인

스님은 생시에 말과 글로 여러 차례 자신의 사후 처리에 대해 언급했다.

“나 죽은 다음에 시줏돈 걷어서 거창한 탑 같은 것 세우지 말고, 어떤 비본질적인 행위로도 죽은 뒤의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라.”

“재단이건 장학사업이건 내 이름을 건 어느 아무것도 하지 마라. 만약 내 이름을 팔아 쓸데없는 일을 도모한다면 저승에서라도 벌떡 일어나 호통을 치겠다.”

말년의 스님은 참 외로웠고, 상상하기 힘든 고통 속에 지냈다.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일이다. 스님 법정! 참으로 큰 이름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큰스님’이 되기를 완강히 거절하면서 오직 ‘맑고 향기롭고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대(大)자유인’이었다.

오명철 문화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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