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한석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외과 교수(51)는 승용차 라디오에서 이른바 ‘조두순 사건’ 소식을 들었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후 두 달이 지났는데 한 의료기기 회사가 피해자인 나영이(가명)에게 평생 동안 무료로 배변주머니를 공급하겠다는 얘기였다. 2008년 12월 당시 8세였던 나영이는 등굣길에 끔찍한 성폭행을 당했다. 대장을 비롯한 장기가 몸 밖으로 쏟아져 나왔고 항문도 파열됐다. 응급수술을 한 의사는 손상이 심한 대장을 다 잘라내고 항문을 막았다. 그리고 배변주머니를 달아 소장과 연결했다.》
○ 귓가를 맴돈 나영이 사연
많은 사람들은 나영이가 평생 배변주머니를 차고 살아야 한다는 소식에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왜 나영이가 항문 없이 평생 살아야 할까. 항문 없이 태어난 아이들한테도 항문을 만들어 줄 수 있는데….”
선천적으로 항문이 없는 아이에게 인공항문을 만들어주는 수술을 여러 번 했던 한 교수는 뉴스를 듣고 혼잣말을 했다.
그가 가입한 산악자전거 동호회원들은 “왜 가만있느냐. 의사로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며 질책했다. 그때부터 그의 머릿속에서는 나영이가 떠나지 않았다.
한 교수의 고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이내 “내가 항문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으니 나영이를 한번 보겠다”고 나섰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한 교수에게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 쉽지 않은 도전
나영이의 상태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한 교수는 대장을 제거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해부학적으로 장이 다 빠져나올 수 없고 대장 전체를 다치기란 힘들기 때문.
한 교수는 “정말 대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놀랐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울 수 있겠단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희망은 보였다. 대장은 없지만 괄약근은 70% 정도 남아 있었다.
2010년 1월 6일 1차 수술이 시작됐다. 한 교수가 수술을 위해 엉덩이와 배를 열자 뒤엉킨 장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염증도 심했고 흉터도 많았다. 특히 골반 쪽에는 염증이 돌덩어리처럼 굳어 있었다. 대장을 대신할 소장이 놓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았다. 작은 나영이의 몸을 치료하는 한 교수의 손은 여느 때보다 정밀하게 움직였다.
한 교수는 1자로 돼 있는 소장을 J자로 만들었다. 장이 1자 상태면 배변을 조절할 수 없다. 항문도 복원시켰다.
1차 수술은 10시간 넘게 걸렸다. 인공항문을 이식하는 수술은 대개 4시간 남짓 걸린다. 하지만 그보다 두 배 이상 걸린 대수술 끝에야 가운을 벗고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해 8월 소장과 항문을 연결하는 2차 수술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배변주머니도 떼어냈다. 이후 인체 조직에 인위적 자극을 줘 본래 기능을 회복하도록 하는 ‘생체되먹임’ 요법 치료가 이어지고 있다.
한 교수는 “현재 일반인에 비해 80% 정도 배변 기능이 회복됐다. 계속 치료한다면 95%까지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자연 임신도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새 삶 찾은 아이들의 미소
한 교수는 올해로 18년째 소아외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다. 처음엔 외과 의사를 생각했다. 이유는 ‘수술을 통해 사람이 살든지 죽든지’ 결론이 나오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학생 때 본 선배 외과 의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수술을 마친 환자의 삶은 곧 의사 어깨에 부담으로 얹어졌다. 소아외과는 그나마 가벼울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어릴 때 수술을 받으니 아이들의 남은 삶은 의사의 삶과도 결부됐다.
“많이 힘들죠. 돈 되는 과도 아니고, 신체 한 부분이 아닌 전체를 다 봐야 하니까. 하지만 힘들게 살려놓은 아이가 웃으며 인사할 때, 건강하게 커나가는 모습을 볼 때 소아외과 의사 하기 잘했단 생각이 들어요.”
그는 1년에 700회 이상 어린이 환자들을 수술한다. 지금까지 1만 번 이상 소아 수술을 집도했다. 선천성 기형, 담도폐쇄, 탈장 등 그가 맡는 아이들의 증상은 천차만별이다. 같은 질병이어도 똑같은 사례는 찾기 힘들다. 매 순간이 새로운 도전이다.
한 교수는 “의료에선 편한 길보다는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게 옳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신념대로 나영이를 찾았다. 그리고 나영이의 웃음을 되찾아줬다. 나영이와 같은 아이들의 미소 뒤에는 어려운 길을 마다하지 않는 고집 센 의사, 한 교수가 서 있다.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조두순 사건::
2008년 12월 11일 등교 중이던 김나영(가명·당시 8세) 양이 범인 조두순에게 유인돼 교회 안 화장실로 납치된 뒤 강간 상해를 당한 사건. 이로 인해 피해자의 항문 등 신체는 심하게 손상됐다. 범인 조두순은 징역 12년형을 선고 받았다. 범행의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조두순이 술을 마신 상태였다는 점 등을 참작해줬다. 김 양은 지금도 손상된 신체에 대한 힘겨운 치료를 받고 있다. 사건 발생 초기에 사용되던 ‘나영이 사건’이라는 용어가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췄다는 비판이 일면서 ‘조두순 사건’이라 불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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