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님! 사인해 주세요.” 3년 전 무협만화 ‘열혈강호’의 양재현 작가는 세계만화가축제 참석차 중국 상하이를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한 중국인이 ‘광(狂)팬’을 자처하며 그의 만화책과 펜을 내밀었는데 이게 웬일? 그 만화책은 ‘어둠의 경로’를 통해 유통된 해적판이었다. 판권 계약이 미뤄진 탓에 중국에서는 열혈강호가 판매되지 않았지만 극성팬들의 수요가 넘쳐나자 급기야 불법으로 유통됐던 것이었다. 》 양 작가는 당시를 회상하며 “만화 한류의 싹이 그때부터 조금씩 자라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상상을 뛰어넘는 아시아 지역에서의 인기를 실감하며 자신감을 얻었다”며 “열혈강호, 나아가 한국 무협만화가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로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만화 한류’ 열풍이 거세다.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은 만화가들도 나라 밖에서는 스타 대접을 받는다. 언론매체는 물론이고 수많은 팬이 찾아와 한류 스타의 인기를 방불케 한다. 순정만화 ‘풀하우스’의 원수연 작가는 대만을 방문했을 때 현지 극성팬들이 공항에 몰려와 풀하우스 브로마이드를 흔들며 반기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앞으로 만화 한류는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KOTRA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토종 만화의 세계 진출을 위해 손을 잡았다. 15일 서울 서초구 염곡동 KOTRA 본사에서 해외 진출이 유망한 만화작가 5명과 기업 5곳을 선정해 맞춤형 해외 진출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두 기관은 다음 달 17일부터 열리는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세계 만화 출판, 유통 바이어를 초청해 상담회를 열고 10월 중국 베이징 국제만화대회에서는 세계 출판기업 관계자들을 초대해 수출 상담을 할 계획이다.
사실 한국 만화는 국내에서 한동안 하락세였다. 국내 만화 시장 규모는 2001년 7600억 원에서 2008년 7200억 원으로 위축됐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매년 50% 이상의 성장세를 보였지만 다 옛이야기다. 한때 청소년들이 즐겨보던 만화잡지도 1990년대에는 26종이나 돼 ‘코믹스 전성시대’를 구가했지만 지금은 고작 6종뿐이다.
그러던 한국 만화는 외국으로 뻗어 나가면서 한류의 차세대 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아시아, 미국, 유럽은 물론이고 만화산업의 최강자 일본에서까지 만화 한류를 이끌고 있다.
형민우 작가의 판타지 만화 ‘프리스트’는 최근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개봉됐을 정도로 북미권에서 큰 인기다. 2001년 미국에 처음 수출된 후 일본과 러시아, 인도네시아, 핀란드, 프랑스 등 33개국에서 100만 권 이상 팔렸다. 형 작가의 인기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아이돌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한 만화산업 전문가는 “프리스트는 서양인이 좋아하는 그림에 동양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 신선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드라마로도 제작돼 인기를 끌었던 박소희 작가의 순정만화 ‘궁’은 2003년 대만 수출을 시작으로 미국, 일본 등 13개국에 판매됐고, 양재현 전극진 작가의 열혈강호도 20개국에 수출됐다.
전문가들은 한국 만화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비결을 ‘착한 만화’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박석환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콘텐츠비즈니스팀장은 “일본 만화는 폭력적이거나 야한 장면이 많지만 한국 만화는 표현 방식이 순수하고 부드러워 거부감 없이 사랑받는다”고 말했다.
여성을 주요 독자층으로 하는 순정만화만 해도 일본의 ‘소녀망가’에 비해 순수한 소녀의 마음을 잘 표현해 세계 여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평가다. ‘마법천자문’, ‘WHY’처럼 자녀의 공부에 도움이 되는 만화도 현지어로 번역돼 중극 등 외국 학부모들 사이에서 큰 인기다. 이현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은 “마법천자문 등은 교육열이 높은 한국의 특징이 녹아 있는 만화”라며 “이는 만화 종주국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착한 만화’의 대표적인 예”라며 학습만화의 인기 비결을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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