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 부족하던 1970년대, 국립식량과학원은 통일벼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식량 자급자족이 최대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원 한편에선 또다른 품종 개발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동진벼라는 이른바 ‘맛 좋은 쌀’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먹을 쌀도 부족한 마당에, 맛있는 쌀을 만들겠다는 건 부자들을 위한 사치스러운 연구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쌀이 넉넉해지자 이번에는 ‘양보다 질’을 요구하는 소비자가 크게 늘었다. 그제서야 연구실 금고에 보관되어 있던 맛좋은 쌀 동진벼가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구개발자들은 “시장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다면 동진벼가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개발은 시대와의 싸움이다. 현재보다는 미래 예측에 더 초점을 맞춘다. 때론 ‘과잉투자’ 혹은 ‘비실용적 관심’이라는 비난을 받지만 그 결실은 10~20년 후 판가름 난다. 농업도 예외는 아니다. 기후변화에 적응할 품종은 무엇일까? 신종 병충해는 어떻게 나타날까? 기온이 상승하면 재배지역은 어떻게 변할까? 이를 예측하지 못한다면 10년 뒤 한국 농업은 경쟁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
○기후변화가 작물을 바꾼다=지난 100년간 세계의 평균온도는 0.73도 상승했다. 국내는 이의 2배인 1.5도가 높아졌다. 기상청에 따르면 1980년 1월 대전과 경북 의성의 평균기온은 영하 3도. 그러나 지금은 영하 3도의 경계선이 강원 원주, 충북 영주로 북상했다.
이런 기온 상승은 사소해 보이지만 지난 30년간 식물의 생장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사과하면 누구나 대구를 떠올렸지만 지금의 사과재배지는 충남 예산을 거쳐, 경기 북부 포천으로까지 북상했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던 한라봉은 30년 만에 전북 김제로 재배지역을 옮겼다. 가장 극적으로 재배지역 북상을 보인 것은 녹차. 전남 보성의 녹차는 2010년 현재 휴전선 인근의 강원 고성에서도 재배되고 있다.
○어떻게 대응하나=기온이 상승할수록 지역별 재배 과일이나 채소의 품종은 바뀔 수밖에 없다. 식물의 생존본능 때문이다. 따라서 머지않은 장래에 동남아에서만 볼 수 있는 망고와 아보카도, 오크라와 같은 과일 채소가 국내에서 재배될지도 모른다.
재배 식물이 바뀌면, 신종 병충해가 따라 나타난다. 따라서 이를 예찰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않는다면 한순간에 재앙을 맞을 수도 있다. 기상이변으로 국지성 집중호우와 같은 변덕스러운 아열대성 날씨가 계속될 것에 대비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미 국내에선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가 나타났다. 생육 저하, 병해충 발생 등으로 작년 쌀 생산량이 전년 대비 9.6%가 감소했고, 기후에 민감한 고랭지배추 생산량은 무려 40%나 줄어들어 포기당 1만 원까지 오르는 파동을 겪었다.
○새로운 농작물이 뜬다=기후를 바꿀 수 없다면, 작물을 바꿀 수밖에 없다. 농촌진흥청은 이에 따라 벼, 마늘, 감자, 참다래 등 4개 작목을 선정해 기후변화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수시로 평가하고 있다.
벼와 마늘 같은 핵심 작물에 대해서는 기후변화에 견디는 품종을 개발하고 있다. 특히 고온 다습 환경에서 살아남는 품종 개발이 초점이다. 열대, 아열대 지역의 작물 도입도 서두르고 있다. 금년에는 망고와 패션프루트 오크라 등 23종을, 내년에는 30종 이상을 토착화하는 연구를 끝낼 예정이다. 결국 이는 연구개발 투자가 취약한 국내 소규모농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농촌진흥청 라승용 연구정책국장은 “포도주 종주국인 프랑스도 보르도지역 포도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개발을 지원한다”며 “농업도 이제는 누가 먼저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느냐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농업기술은 세계 5위권이라고는 하지만 작년 기준으로 미국에 3.9년, 일본에 2.7년, 유럽연합(EU)에 1.9년 뒤져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또 세계 수준을 100으로 보았을 때 농업생명공학기술은 59.5점, 친환경농업기술은 68.2점, 농업자동화 기술은 63.2점으로 평가돼 비교적 낮은 수준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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