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후 3시 전남 완도군 보길면 예송리 갯돌(검은자갈) 해변. 태풍 ‘볼라벤’이 지나간 지 하루가 지난 해변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엄청난 파도에 떠밀려온 가두리 양식장 그물과 어구, 스티로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1km에 달하는 해변의 절반가량이 쓰레기가 된 장비로 뒤덮여 버렸다. 김환종 씨(36)는 얽히고 구겨진 전복 양식장 시설물 더미를 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김 씨는 “워낙 피해가 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다”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태풍이 보길도의 꿈을 쓸어가 버렸다. 완도읍에서 서남쪽으로 23km 떨어진 보길도는 주민들이 ‘전복으로 먹고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복 양식이 주업이다. 예송리 117가구 가운데 78어가가 마을 앞 해상 40ha에서 전복을 키우고 있는데 이 중 45어가가 20∼40대 청장년층이다. 대부분이 도시에 살다 ‘부자 어부’를 꿈꾸며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김 씨도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다 2002년 보길도로 내려와 전복을 키웠다. 8평짜리 단칸방에서 아내와 자녀 3명이 함께 살았지만 언젠가는 큰돈을 만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에 힘든 바다일도 참아냈다.
하지만 28일 오전 몰아친 태풍 볼라벤은 김 씨의 꿈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볼라벤은 그가 2∼3년간 애지중지 키우던 전복 90만 마리를 순식간에 앗아갔다. 김 씨는 “10년간 번 4억 원에 집과 땅을 담보로 빌린 3억 원 등 7억 원을 양식장에 쏟아부었다”며 “사라진 양식장을 보니 억장이 무너진다”며 고개를 떨궜다.
전복으로 돈을 벌어보겠다며 3년 전 고향에 내려온 고영길 씨(26)도 한숨만 내쉬고 있다. 고 씨는 가두리 양식장 200칸을 설치해 지난해 첫 수확의 기쁨을 맛봤다. 5000여 만 원의 수입을 올린 고 씨는 올 추석 대목을 맞아 출하를 앞두고 있다 날벼락을 맞았다. 부서진 시설물을 다 치우고 새 시설물을 설치하려면 최소한 2억 원 이상이 필요하지만 대출금도 아직 못 갚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고 씨는 “고향에서 결혼도 하고 환갑을 넘긴 부모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려고 했는데 태풍이 내 꿈을 다 앗아가 버렸다”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예송리 인근 통리도 25ha에 이르는 전복 양식장이 모두 쓸려 나갔다. 광주에서 대기업 하청업체에 다니다 6년 전 귀향한 백승우 씨(37)는 “수협에서 받은 귀어(歸漁) 자금과 가두리 양식장을 담보로 빚을 내 전복을 키웠는데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됐다”며 “당장 이달부터 넣어야 할 대출이자 때문에 초등학생 남매를 학원에 보내지 못할 것 같다”며 울먹였다.
보길도에서 가장 양식장 면적이 넓은 중리는 지난해 8월 태풍 ‘무이파’에 이어 이번에 또 직격탄을 맞았다. 50ha 규모의 양식장 대부분이 큰 피해를 봐 어민들의 시름은 더 크다. 윤성택 씨(72)는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잘 살려고 하는 것을 보고 대견했는데…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보길도는 연간 전복을 2500t 정도 생산해 국내 전복 생산량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510어가가 전복 양식으로 한 해 1000억 원이 넘는 소득을 올려 수년 전부터 부자 섬으로 불려왔다. 전복양식은 젊은층을 불러들이는 귀향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전체 어가의 40%가 청장년들이다보니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다. 섬에 생기가 넘치면서 어린이 놀이터가 새로 생기고 계속 줄어들던 인구도 2009년 이후 증가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이번 태풍으로 7개 어촌계가 관리하는 양식장이 모두 쑥대밭이 되면서 주민들의 가슴은 타들어가고 있다. 김종욱 보길면사무소 수산담당은 “보길도는 바닷물이 깨끗하고 평균 수온이 20도로 전복 양식의 최적지”라며 “지난해 태풍 때는 피해액이 200억 원이었지만 올해는 1000억 원이 넘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귀남 예송리 어촌계장(63)은 “태풍에 4억∼5억 원의 양식장 파손 피해를 당해도 5000만 원 이상 지원을 받기 힘들고 그나마 지원이 되더라도 수개월 이상 지연되는 경우가 많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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