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낮 서울 종로구 관철동 종각역 앞. “아줌마”란 말 한마디에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 여성은 모른 척 지나갔다. 싸늘한 날씨만큼 얼굴엔 불쾌함이 가득했다. 걸음을 재촉하던 여성은 갑자기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른 듯 혼자 중얼거렸다. “어디다 대고 다짜고짜 아줌마래….”
#2.“아주머니, 잠깐만요?”
같은 시간 서울 종로구 예지동 광장시장. 취재진이 “아주머니”라고 부르며 말을 붙이자 길을 걷던 주부 박모 씨(53)가 발걸음을 멈췄다. “네, 무슨 일이시죠?” 길을 묻는 질문에 박 씨는 다정다감하게 손짓을 해가며 흔쾌히 방향을 설명해줬다. 그러고 한마디 남겼다. “길 잘 찾아서 가요.” 》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은 이날 서울시내 일대에서 40∼60대 중장년 여성 120명을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했다. 60명에게는 “아줌마”라고 부르며 말을 걸었다. 다른 60명에게는 “아주머니”라고 말을 붙였다. 듣기에 따라선 아주 미묘한 차이. 당사자인 중장년 여성들은 이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 차이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아줌마” 소리를 들은 60명 중 30%인 18명은 대답조차 없이 지나쳐 가거나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반면 “아주머니”라고 말을 건 60명 중 취재진을 무시하고 지나쳐 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줌마’라고 불렸을 때 기분 나쁘다는 반응을 보였던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한 50대 여성은 “나이가 들었으니 아줌마 소리를 듣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고 했다. 다른 40대 여성은 “일단 아줌마란 말로 문장이 시작되면 그 다음 말들도 모두 말이 짧고 건방지게 들린다”고 설명했다.
물론 “더 친근하게 들린다”거나 “워낙 많이 듣는 말이라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대답도 있었다. 하지만 “여성성을 잃어버린 기분이 든다” “사회적 지위와 인격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이라는 매우 부정적인 반응 역시 적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한국 여성은 나이가 들면서 이름을 잃게 된다고. 모두 ‘아줌마’란 똑같은 이름표를 달게 된다고.
정작 남녀노소 누구나 너무나 익숙해 아무 생각 없이 쓰게 되는 말, 아줌마. 그런데 이 익숙한 아줌마란 세 글자가 당사자인 아줌마들의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이유가 뭘까.
역사학자들은 ‘아주머니’라는 호칭의 어원을 ‘작은 어머니’에서 찾는다. 박영수 테마역사문화연구원 원장이 쓴 ‘우리말 뉘앙스 사전’에 따르면 부모와 같은 항렬이나 비슷한 나이대 여성을 부르던 옛 한글인 ‘아ㅱ미’가 그 어원. ‘아ㅊ’(버금가다·次)와 ‘어미’(母)의 조어다. 존칭인 ‘씨’를 덧붙여 ‘아줌씨’로 부르기도 하다가 ‘아주머니’로 정착됐다. 이를 높여 ‘아주머님’이라고도 한다.
어원만을 따져보면 딱히 부정적인 의미는 없는 셈. 하지만 아줌마라는 말은 전후 고속성장 시기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뒤섞여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던 모습에서 탈피한 중장년 여성들을 사회가 ‘아줌마’라는 새로운 집단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조남호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은 “가정에서 살림을 꾸리고 자녀에게 더 나은 성장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험한 일도 서슴지 않던 강인한 어머니상(像)이 요구되던 시기를 거친 중장년 여성들이 지금의 아줌마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다소 억척스러운 모습이나 버스,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 자리를 다투는 등 세련되지 못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일련의 행동들이 아줌마라는 말에 비하적인 의미를 더했다고 조 실장은 설명했다.
그래서일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아줌마를 ‘아주머니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어린아이들이 아주머니라는 말 대신 쓰는 표현’이라는 설명도 있다.
사실 아줌마라는 호칭을 대체할 수 있는 표현은 제법 다양하다.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친근함과 존중의 뜻을 담아 ‘어머니’라고 부르거나 아줌마의 바른 표현인 ‘아주머니’라 써도 좋다. ‘사모님’이란 표현은 원래 ‘선생님의 부인’을 칭하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중년여성에 대한 존중의 의미를 담아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의 부인을 부르는 말로도 쓰이기에 아줌마 대체 호칭으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아줌마란 호칭에 면죄부를 줄 만한 상황은 언제일까. 중년 여성들은 대체로 “내가 아줌마란 사실은 알면서도 이왕이면 아줌마로 불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나마 초면이 아닌 어느 정도 친근한 사이일 땐 아줌마란 표현을 용서해 줄 수도 있다는 반응. 한 ‘아주머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호칭보다 중요한 게 ‘나’라는 사람이 인격적으로 얼마나 존중받고 있느냐의 느낌인데…. 일단 상대가 아줌마로 부르면 반쯤은 내 인격을 무시하고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언짢아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