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아베의 DNA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7일 03시 00분


22일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리셉션이 열린 일본 도쿄 셰러턴미야코 호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대독한 박근혜 대통령의 기념사를 경청한 뒤 종종걸음으로 행사장을 빠져나가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걸음을 멈췄다. 몇 걸음 뒤로 돌아온 그는 활짝 웃으며 군중 속에 있던 키 큰 남자에게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습니까”라며 악수를 청했다. 전설의 재일교포 야구인 장훈 씨였다. 아베 총리가 얼핏 그를 발견하고 손을 내민 것이었다. 지켜보던 한일 참석자들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한국에서 아베 총리는 편협한 ‘극우’로 비친다. 과거사를 부정하는 ‘역사 수정주의자’ 이미지가 덧씌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 언론계에서는 역사 인식과 별개로 그가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2006년 출간한 자전적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에서도 그는 “일본은 오랜 기간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흡수해 온 역사를 갖고 있다. 한일 관계를 낙관하고 있다”고 적었다. 많은 외교 전문가는 ‘아베 총리는 으레 이럴 것이다’라는 한 가지 렌즈로만 그를 보면 한국의 대응이 빗나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한일 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올 8월 전후 70주년에 대한 ‘아베 담화’가 과거사를 어떻게 표현할지가 관계 개선의 변수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베 총리는 올해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무투표 당선’이 확실시된다. 한국은 좋으나 싫으나 앞으로 3년 더 그를 상대해야 한다. 일본 정치 전문가인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양국의 대응이 바뀌는 지금이야말로 입체적인 눈으로 그를 바라봐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과연 누구인가. 그의 뿌리를 추적해 본다.  
▼ 고독한 유년시절… 현직 총리였던 외할아버지 품에서 성장 ▼

1954년 아베 신타로의 차남으로 출생


아베 총리의 아버지는 1991년 별세한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전 일본 외상이고 할아버지는 아베 간(安倍寬·1894∼1946)이다.

야마구치(山口) 현 오쓰(大津) 군 출신인 간은 양조장을 경영했던 지역 유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적이 뛰어났던 간은 도쿄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고향 마을의 촌장과 현 의회 의원 등을 지냈고 1937년 총선 때 군부 앞에 무력한 기성 정당을 통렬히 비판하며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했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1884∼1948) 내각이 전쟁에 비협조적인 후보를 낙선시키려 추천 제도를 도입했던 1942년 총선에서도 그는 비(非)추천 후보로 당선했다.

당선 후 도조 내각 퇴진과 전쟁 종결 운동을 벌이는 간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간은 일본 패전 이듬해인 1946년 결핵에 걸려 손자들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아베 신타로는 마이니치신문 기자 시절이던 1951년 정치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를 취재하던 동료 기자의 소개로 그의 장녀 요코(洋子)와 결혼했다. 기시와 간은 야마구치 현 고향 선후배 사이로 아는 사이였다. 이듬해 기시가 외상이 되자 신타로는 기자를 그만두고 비서관으로 합류했다. 다시 장인이 총리가 되자 총리비서관으로 옮긴 뒤 1958년 총선거에 출마했다.

신타로는 기시의 후광을 누렸지만 그의 사위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반전 평화주의 노선을 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로 출격하기 직전에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평화를 위한 잉여인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56년 마이니치신문 기자이던 아베 신타로(왼쪽 뒤) 가족이 공원으로 보이는 곳에서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왼쪽 앞이 아베 신조 총리, 오른쪽 앞은 장남인 히로노부, 오른쪽 뒤는 신타로의 아내인 요코 씨. 아베 신타로 기자는 그해 12월 외상이된 장인 기시 노부스케의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사히신문 제공
1956년 마이니치신문 기자이던 아베 신타로(왼쪽 뒤) 가족이 공원으로 보이는 곳에서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왼쪽 앞이 아베 신조 총리, 오른쪽 앞은 장남인 히로노부, 오른쪽 뒤는 신타로의 아내인 요코 씨. 아베 신타로 기자는 그해 12월 외상이된 장인 기시 노부스케의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사히신문 제공
아베 신조는 신타로의 차남으로 1954년 9월에 태어났다. 그의 두 살 위 형 아베 히로노부(安倍寬信)는 박근혜 대통령과 나이가 같은데, 현재 미쓰비시 상사 패키징 사장이다. 이 회사의 계열사인 미쓰비시 중공업은 현재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 소송으로 한국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회사다.

아베 신조는 이름이 지어질 때 아버지 이름에서 한 글자(晋)를 받았다. 다만 차남인데 신지(晋二)가 아니라 신조(晋三)로 한 것은 한자 획수가 좋아 선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베 신조는 정치적으로는 친가를 외면하고 외가의 계보를 따랐다. 그 스스로 “나는 아베 신타로의 아들이지만 기시 노부스케의 DNA(유전자)를 이어받았다”고 공언할 정도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아베 총리의 어린 시절에 그의 부모는 아이들을 돌볼 틈이 없었다. 정치인이던 신타로는 매일 밤늦게 귀가했고 어머니 요코는 남편의 지역구 관리를 위해 시모노세키(下關)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도쿄에 홀로 남겨진 아이들을 돌본 사람은 유모와 주말마다 손자들을 부른 외할아버지였다. 손자들의 운동회에도 현직 총리인 외할아버지가 찾아갔다.

신타로는 ‘가정’에 서툴렀다. 자식들에게 애정 표현을 할 줄 몰랐고 아이를 안거나 학교 참관수업에도 간 적이 없었다.

어린 아베 신조를 더 고독하게 한 인물은 다섯 살 아래 동생이었다. 이 동생은 태어나자마자 대가 끊긴 외할아버지 기시 가문을 잇기 위해 외삼촌의 양자로 보내졌다. 그래서 지어진 이름이 기시 노부오(岸信夫). 현재 중의원 의원이다. 그는 게이오대에 진학하기 위해 호적등본을 뗐을 때 자신의 출생 비밀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동생 노부오가 기시 가문으로 보내진 후 외할아버지의 사랑은 친손자가 된 노부오에게 쏠렸다. 이때부터 아베 총리는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치인이 되겠다”며 각오를 다진 것으로 전해진다. 교도통신 기자 출신의 정치평론가 노가미 다다오키(野上忠興) 씨는 25일 본보와 만나 “아베 총리가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에 친조부를 외면하고 기시 쪽에 기울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시사주간지에 아베 총리의 어린 시절을 연재하고 있다.

기시 노부스케에서 물려받은 정치 DNA


아베 총리의 외가는 일본 최고의 정치 명문 가문이다. 외할아버지인 기시 전 총리는 야마구치 현청 직원이던 사토 히데스케(佐藤秀助)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토 히데스케는 원래 기시 집안이었지만 사토 집안에 데릴사위로 오면서 성을 바꿨다. 기시 전 총리는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 친가인 기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친가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사토에서 기시로 바꿨다. 당시 일본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의 친동생은 ‘비핵 3원칙’을 마련한 공로로 197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총리다.

기시 노부스케의 정치적 고향인 ‘조슈(長州·야마구치 현의 옛 이름) 번은 일본에서 근대화의 선각자로 추앙받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을 배출한 지역이다. 요시다는 한반도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을 가르쳤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때 총리인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도 조슈 번 출신이다.

이들의 영향권 아래서 성장한 기시는 몸이 약해 군인 대신 관료의 길을 택했다. 1920년 도쿄대 법학부를 수석 졸업한 그는 농상무성 관료로 금방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일본 괴뢰정부인 만주국의 산업부 차장(차관)과 총무청 차관을 겸직한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1942년 총선에 출마해 최고 득표로 당선했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자 군수성 차관을 맡아 도조와 전시 경제를 운영했다.

패전 직후 기시는 A급 전범으로 기소돼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됐다. 1948년 도조 등 A급 전범 7명이 처형됐지만 그는 그해 성탄 전날 3년 만에 풀려났다. 전쟁 말기 도조 내각에 맞섰다는 점을 참작해 미국이 그의 재능을 활용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꿨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시는 형무소에서 연합국에 분노했다. A급 전범 7명에 사형 선고가 내려진 다음 날 그는 일기에 “이번 재판은 사실을 왜곡한 일방적 편견에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난폭하기 이를 데 없다”고 적었다. 옥중 심경을 기술한 ‘단상록’에는 ‘대동아전쟁을 일본의 침략전쟁이라고 전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글을 남겼다. 도쿄 전범재판이 “승자의 논리”라며 전후 체제 탈각을 외치는 아베 총리의 현재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하타노 스미오(波多野澄雄) 쓰쿠바대 교수는 “아베 총리의 외가는 일본의 자긍심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며 “아베 총리가 그 흐름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형무소에서 풀려난 기시는 실용주의 행보에 집착했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미국을 이용하고 손을 잡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55년 자민당 초대 간사장을 거쳐 1957년 총리에 취임한 그는 1960년 격렬한 반대시위에도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해 일본에 대한 미국의 군사 보호를 못 박았다. 이를 통해 일본은 군사적 부담을 덜고 경제에 매진할 수 있었다. 1960년 총리 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막후에서 일본 정가에 영향력을 행사해 한일 국교정상화를 지원했다.  
▼ 계산된 ‘用美封中’ 외교전략… 관계개선 메시지 속뜻 읽어야 ▼

회사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아베


1988년 당시 아베 신타로 자민당 간사장(오른쪽)이 자신의 지역구인 시모노세키를 방문해 이즈미다 요시쓰구 시장과 시정 자료를 
살펴보는 모습을 아베 신조 비서관(가운데)이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당시 이즈미다 시장은 부산∼시모노세키 고속페리 취항을 
건의했다. 아베 총리는 아버지의 비서관으로 일하며 정치를 배웠다. 아사히신문 제공
1988년 당시 아베 신타로 자민당 간사장(오른쪽)이 자신의 지역구인 시모노세키를 방문해 이즈미다 요시쓰구 시장과 시정 자료를 살펴보는 모습을 아베 신조 비서관(가운데)이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당시 이즈미다 시장은 부산∼시모노세키 고속페리 취항을 건의했다. 아베 총리는 아버지의 비서관으로 일하며 정치를 배웠다. 아사히신문 제공
아베와 기시 양 집안은 이른바 ‘도쿄대 법학부 진학’을 당연하게 여겼던 가문이다. 외할아버지와 그 동생 사토 에이사쿠, 친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이곳 출신이다.

하지만 아베 형제는 공부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까지 자동으로 갈 수 있는 세이케이 초·중·고교에 진학했다. 유력 집안의 ‘도련님들’이 주로 다니던 학교였다. 당시 아베 총리는 동기생들 사이에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학생으로 기억됐다.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 다만 외할아버지가 추진했던 안보 관련 이슈가 나오면 갑자기 말이 많아지고 논객으로 돌변해 ‘안보 아베’로 불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고교생이 되자 도쿄대에 가야 한다고 꽤나 압박했다. 하지만 아베 신조는 결국 세이케이대 법학부 정치학과에 들어갔다. 아베 총리가 알게 모르게 ‘학력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배경이다.

정치평론가 노가미 씨에 따르면 대학생 아베 신조는 이탈리아 고급 스포츠카인 빨간색 알파로메오를 몰면서 마작과 양궁부 활동에 빠져 학창시절을 보냈다. 특히 마작을 좋아하는 건 집안의 내림으로, 아베 신조 부모가 모두 마작을 즐겼다.

아버지는 아들의 모자란 학력을 보충하기 위해 1977년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 남캘리포니아대로 유학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향수병을 견디지 못하다 결국 1년 반 만인 1979년 봄 귀국하고 만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를 기업들은 서로 끌어가려 했다. 아버지 신타로의 후광 효과 때문이었다. 1979년 5월 1일 아버지는 아들을 야마구치 현 시모노세키 시에 제철소를 둔 고베제강에 입사시켰다. 자신의 선거구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회사원 아베가 일에 재미를 붙이던 중 1982년 11월 출범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에서 외상으로 취임한 아버지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회사를 그만두고 정무비서관으로 들어오라는 호령이었다. 아베 신조는 퇴사를 거부했다. 아버지의 일방적 명령에 대한 반발과 회사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곤란해진 것은 회사였다. 간부들이 총동원돼 설득 작전에 나섰고 결국 그는 3년 반의 월급쟁이 생활을 뒤로하고 아버지 밑에서 본격적인 정치수업을 받게 됐다.

외상 비서관 시절이던 1984년 아베 신조는 젊음의 거리인 하라주쿠(原宿)의 한 맥줏집에서 친구의 소개로 이른바 ‘소개팅’을 하게 된다. 마쓰자키 아키오(松崎昭雄) 모리나가제과의 사장 딸로 일본의 세계적인 광고 대기업인 덴쓰에 다니던 마쓰자키 아키에(松崎昭惠)였다. 여덟 살 연하인 아키에는 소개팅 첫날 30분 지각해 첫인상을 구겼지만 둘은 3년 후인 1987년 6월 웨딩마치를 울렸다.

당시 90세이던 기시 노부스케는 외손자 아베 신조의 결혼식이 끝나고 두 달이 지나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아베 신조를 병실에 불러 유언을 남긴다. 1987년 7월 치러지는 야마구치 참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베 신조는 다른 유력 의원의 반발 때문에 출마하지 못했다.

아베 총리가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된 것은 1993년 만 37세 때였다. 1991년 작고한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은 것이다. 이후 그는 외할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정치 역정을 걸어왔다.

달라진 아베 정권의 성공비결

아베 총리는 2006년 9월 전후 최연소이자 전후 세대 첫 총리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나 1년 만인 2007년 9월 건강 악화를 이유로 돌연 사임했다. 하지만 5년 3개월 만인 2012년 12월 다시 총리(96대)에 오른 뒤 훨씬 더 노련하게 일본 정국을 이끌고 있다.

그에 대한 지지율은 최근 조금 떨어졌지만 여전히 높은 편이다. 당내에서나 의회에서 대항 세력이 없을 정도로 카리스마도 강력하다. 그의 인기 유지 비결로는 △민심을 읽는 능력과 결단력 △과감한 인재 중용 △뛰어난 소통 능력이 꼽힌다.

그는 96대 총리 취임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 침체됐던 경제와 외교를 활성 모드로 바꿔놓았다. 특히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기메라레나이(決められない) 정치’에 대한 국민의 누적된 불만도 등에 업고 강한 리더의 이미지를 굳혔다. 강력한 경기 부양으로 국민의 불만을 잠재운 뒤에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 등 정략적인 성과를 슬그머니 얻어내는 식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1차 정권 때 측근들로 구성된 ‘도모다치(友達·친구) 내각’으로 선거에 참패한 경험을 잊지 않고 우수한 인재라면 당파를 가리지 않고 요직에 배치하고 있다. 총재 선거 때 싸운 정치 라이벌도 각료에 대거 등용할 정도로 과감하다. 그의 강력한 라이벌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를 자민당 간사장으로 임명해 2013년 6월 참의원 선거를 치르게 했고, 여기서 압승해 당내에 그의 세력이 확대될 기미를 보이자 지방창생담당상에 임명해 다리를 묶었다.

그의 소통 능력은 타고났다는 평을 듣는다. 유흥수 주일 한국대사는 “아베 총리는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뭐든지 보고하게 하고 툭 터놓고 얘기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정치적 감각이 보통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를 전담 취재하는 일본 신문사 기자는 “아베 총리는 ‘예능’ 기질이 있다. 저녁 자리에서 아베 총리의 얘기에 빠져 웃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고 전했다.

요즘 아베 총리는 스트레스 관리에도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1차 정권 때와 달리 총리 공관에 입주하지 않고 기분 전환을 위해 승용차로 15분 거리인 시부야 자택에서 출퇴근한다. 주말에는 소파에 옆으로 누워 영화와 드라마를 즐겨 보는데 미국 드라마 팬으로 유명하다. 그의 집을 방문했던 일본 기자는 “집에 DVD가 엄청나게 쌓여 있는데 좀비 영화인 ‘워킹데드’, 미국의 정치 드라마인 ‘하우스 오브 카드’ 등을 즐겨 보고 있었다”고 전했다.

아베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아버지 밑에서 외교를 배운 아베 총리는 외교 문제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문가다. 철저한 계산에 따라 일본에 유리한 외교환경을 조성하는 데 능수능란하다. 한국에 대해 “대화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거나 중국에 대해 “냉정하고 의연하게 대처하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해외에서 볼 때 ‘한국이 대화의 문을 닫고 있으며 중국은 비이성적’이라는 선입견을 심어주는 ‘공격’ 효과를 얻고 있다.

특히 미국을 전통 우방으로 삼아 중국을 견제한다는 용미봉중(用美封中)은 당초 아베 정권을 경계하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마음도 움직였다. 일본 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올 4월 아베 총리의 사상 첫 미 상하원 합동 연설이 성사되자 “정권 출범 때는 뒷문으로 들어갔다면 이번에는 현관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런 아베 총리를 한국은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일본 정계 인사들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늘 연립여당인 공명당과의 타협을 염두에 두고 처음에는 강경책을 내놓는 경향이 있다.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이 관철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일단 호가(呼價)를 높이 부르고 보자는 정치수법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베 총리의 극우 성향 발언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아베 총리를 잘 아는 일본 정계 인사들은 ‘총리’ 아베와 ‘국회의원 시절’의 아베가 다르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고 당부했다. 국회의원 때는 ‘막 나가는’ 발언을 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총리가 된 이후에는 현실주의적 색채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가 1차 정권 출범 직후인 2006년 10월 주위의 예상을 깨고 베이징(北京)과 서울부터 방문해 전임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로 망가졌던 관계를 회복하려 시도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아베 총리와 20년째 인연을 맺어온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아베 총리는 자신의 이념과 원칙을 가진 이데올로그의 얼굴과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국익을 생각하는 현실주의자의 얼굴을 둘 다 갖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앞의 얼굴만 보고 있다”며 “아베 총리를 한쪽에서만 볼 게 아니라 그의 현실주의 노선도 충분히 감안해야만 대일(對日) 정책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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