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퇴계 종가의 차례상엔 떡국-과일 몇 가지뿐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6일 03시 00분


[2016년 우리에게 설날은?]전통의 설

설을 나흘 앞둔 4일 퇴계 이황의 17대 직계 후손인 이치억 성균관대 초빙교수가 차례를 지낼 때처럼 유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내 동재에 섰다. 이 교수는 “설은 조상 앞에서 지난 한 해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설을 나흘 앞둔 4일 퇴계 이황의 17대 직계 후손인 이치억 성균관대 초빙교수가 차례를 지낼 때처럼 유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내 동재에 섰다. 이 교수는 “설은 조상 앞에서 지난 한 해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차례상에 올리고 손님에게 내갈 떡만둣국을 끓이느라 부엌의 가마솥에서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손님이 잇따라 대문을 열 때마다 검둥이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짖었지만 어린 이치억 씨(41·성균관대 초빙교수)는 반갑지 않았다. 또래 친구들은 벌써 설 차례를 지내고 얼어붙은 무논 위에서 썰매를 타거나 제기를 차러 나갔다. 산토끼를 잡으러 눈 쌓인 산에 간 아이들도 있었다. 할머니가 벽장에 넣어 두었다가 화로에 구워 주신 군밤도 빨리 먹고 싶었다. 하지만 퇴계 이황의 17대 직계 후손인 이 씨는 사랑방에서 일가친척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설을 맞아 종가를 찾은 집안 어른들은 “네가 장래 종손이지”라고 말하며 손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긴 당부의 말과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족보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전날 밤 늦게 사당에 ‘묵세배(묵은세배·섣달그믐날 저녁에 올리는 세배)’를 올린 터라 이 씨는 눈꺼풀이 감겨 왔다.

“그게 어른들이 주신 사랑이었는데, 그때는 잘 몰랐던 거죠. 그래도 동네에서 세뱃돈은 제일 많이 받았어요.”

수십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경북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퇴계 이황 종택에서는 설 전날 밤이면 이 씨의 부친인 16대 종손 이근필 옹(84)이 사당의 문을 연다. 제사 때만 문이 열리는 사당 안에는 퇴계 선생과 종손의 고조부부터 부친까지 4대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종손은 오른쪽 곁문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돌마루에 오른 뒤 사당을 향해 세배를 올린다. 17대 종손이 될 이 씨를 비롯한 다음 항렬 자손들이 뒤이어 절을 올린다. ‘조상님, 올 한 해도 큰 탈 없이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씨가 어릴 적에는 50명이 넘는 집안사람들이 종가의 설 차례에 참석했다. 멀게는 촌수가 30촌이 넘지만 모두 일가다. 요즘은 부모님을 서울 등으로 모셔간 이들이 많아 고향을 찾는 사람이 줄었지만 그래도 차례를 지내는 인원이 30여 명에 달하고 아이들까지 합치면 60여 명이 오간다. 설 당일에 오지 못하지만 며칠 안에 종가에 와 사당과 종손에게 세배를 올리는 친척도 많다.

근처에 있는 진성 이씨 종가는 퇴계 선생의 조부부터 내려오는 큰 종가, 퇴계 선생의 손자 대부터 내려오는 작은 종가 등 여러 곳이 있다. 차례는 오전 9시, 11시, 낮 12시 등 종가마다 시간을 달리해 지낸다. 제관(祭官)들이 여러 종가의 차례에 모두 참석하기 때문이다. 이 씨도 다른 종가를 찾아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올린다.

종가의 차례상에는 상다리가 부러질 듯 온갖 음식이 오를 것 같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간소하다. 과일 몇 가지, 포, 전 한두 가지, 떡국 등이다. 이 씨의 조부가 살아 계실 적부터 간소했었다. 이 씨는 “아버지도 ‘제사 음식은 남기면 안 된다. 참석한 사람들이 한 끼 먹을 만큼만 준비하면 된다’고 하신다”며 “옛날에도 간소했듯이 평소 음식이 부족하지 않은 요즘도 굳이 음식을 많이 차릴 필요가 없다고 본다”고 했다.

간소하게 차리다 보면 조율이시, 좌포우혜, 동두서미, 홍동백서 같은 차례상 차리는 예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닐까.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진설도(陳設圖·제사상의 제수를 배열한 그림)를 봐도 앞줄에 과일, 과일, 과일 이런 식이지 꼭 어떤 과일을 어느 자리에 놓아야 한다고 돼 있지 않아요. 포와 젓갈, 고기와 생선, 이런 식으로 밥상하고 같은 개념이지요. 차례와 제사 음식을 상에 올릴 때 하나하나 위치를 정하는 것에도 우리 전통문화가 담겨 있지만 그게 반드시 유학(儒學)적인 것은 아니에요.”

퇴계 이황의 학문을 연구하는 이 씨는 “더 많이 올리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지만 오히려 지나치지 않게 어느 정도 선을 긋는 것이 예(禮)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설에 종가를 찾은 손님들이 아버지와 말씀을 나누는 동안 이 씨는 차와 과일을 내가거나 청소하느라 바쁘다. 이른 새벽 세배를 앞두고 사당을 청소하려면 차가운 마루에 발이 꽁꽁 언다. 언 손을 불어가며 행주로 상을 닦으면 금세 상에 얼음이 내려앉는다. 성인이 된 뒤에도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번거롭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보람이 훨씬 크다고 한다.

“설은 시간의 마디입니다. 관혼상제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려는 의례인 것과 마찬가지로 설도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차례는 조상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이 모여서 의미를 부여하고 존재의 뿌리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전통#설#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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