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대표적 판자촌인 노원구 상계동 양지마을에 살다가 15년 전 마포구의 한 영구임대아파트로 이사 온 이모 씨(78·여). 그는 현재 마음 터놓고 지내는 이웃이 단 세 명이다. 아파트로 오기 전엔 담 너머로 이웃이 보였고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나눴다. 또 서로 집을 오가며 언니, 오빠라고 부르며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아파트에선 문만 닫혀도 노크조차 부담될 정도로 이웃 사이에 심리적 문턱이 높았다. 이 씨는 ‘외로움 상자’ 속에 사는 기분이라고 전했다. “기쁜 마음으로 이사 왔지만 갈수록 힘이 돼주던 이웃의 빈자리가 커져갑니다.”
○ 아파트는 외로움 상자
임대아파트 거주민의 평균 소득은 하위 20% 이하의 저소득층이다. 노인과 장애인 등 거동이 불편한 주민도 많아 생활공간은 대부분 단지 내로 한정된다. 인적 관계망이 이웃을 넘어서기 힘들다. 지난달 16일 본보가 만난 이 씨의 하루도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집 안에서 TV를 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장보러 나가는 것이 외출의 전부였다. 그나마 아파트 인근에 복지관이 있어 가끔 이곳 ‘노래교실’에 참석해 외로움을 달랜다. 김주영 세종대 건축학과 박사는 “임대아파트는 대부분 보행로가 좁고 단지에 울타리가 쳐져 있다. 또 외부에 마트와 공원이 있어도 몇 안 되는 출입구가 엉뚱한 곳에 위치해 이를 이용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아파트의 이 같은 고립된 건축이 주민들의 외로움을 부추긴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김영욱 세종대 건축학과 연구팀은 2007∼2011년 소득 수준이 비슷한 노원구 전체 임대아파트 9개 단지 1만3472채와 판자촌 5개 마을 2818채의 주민을 조사해보니 임대아파트의 자살률(39.21명·인구 10만 명당 환산 수치)이 판자촌(29.84명)보다 높게 나왔다. 연구팀은 소통공간의 유무와 건물 배치가 자살률 차이를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판자촌은 내부에 동네길이 이어져 있어 주민들 간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만 임대아파트는 바둑판식으로 길(단지)을 배치해 주민들이 마주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 사람 냄새 나는 달동네
지난달 14일 양지마을에서 만난 최종임 씨(71·여)는 외로울 때마다 골목길을 걷는다. 이웃과 마주치면 수다라도 떨고 싶어서다. 마을 한복판에 조촐하지만 사람이 붐비는 ‘만남의 장소’도 있다. 공사장 폐목재로 기둥을 세우고 비닐을 덧댄 7평짜리 비닐하우스다. 2014년 말 이곳 주민 노재범 씨(61)가 만들었다. 골목길에 주저앉아 얘기를 나누던 주민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어울렸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노 씨는 “골목에서의 우연한 만남 하나도 다 삶의 재미”라며 “이곳은 그런 재미를 사시사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약 100채가 자리 잡은 이 마을엔 홀몸노인이 80%가량이다. 이웃들은 길에서 자주 보던 노인이 하루라도 안 보이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을 찾아 안부를 묻는다. 김희선 양지마을 통장은 “홀로 사는 노인에겐 이웃이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지지대”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가 만난 양지마을 주민들은 임대아파트로 이사할 조건이 되지만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파트가 살기에는 편하지만 문만 닫으면 고립된 섬처럼 느껴진다는 이유에서다. 정영숙 씨(71·여)는 “명절에 한 번 보는 가족보다 아플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와주는 이웃이 고맙다”며 “소득과 재산이 없어 (임대아파트) 입주조건은 되지만 다 늙어 이웃을 떠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마을 통장은 “정 씨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거들었다.
양지마을의 사례만으로 임대아파트보다 달동네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 많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스페이스신택스연구소 연구팀이 그동안 송파구 화훼마을, 강남구 수정마을 등 서울시 31개 달동네를 찾아다니며 분석한 결과도 비슷했다. 신행우 연구실장은 “동네길이 발달돼 있고 이웃 간 친밀도가 높은 달동네가 많다. 그곳에선 주민들이 ‘굳이 임대아파트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반응이 높았다”며 “판자촌에 살다가 임대아파트로 이사 간 주민들 중에도 후회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 사생활과 공동체의 갈림길
아파트의 외로움은 임대아파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간 아파트의 설계와 건축은 ‘사생활 보호’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건설사들은 너도나도 ‘나만의 해방구’를 마련해 주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 지어진 고가의 신식 아파트가 대표적이다. 단지 구성을 차가 쉽게 이동할 수 있게 설계해 주민들은 차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엘리베이터로 자신의 집까지 올라간다. 단 한 명의 이웃과도 마주치지 않고 외출과 귀가가 가능한 점을 자랑거리로 내세웠다.
하지만 최근 건축업계는 아파트를 공동체 친화적으로 짓는 것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층간 소음, 주차 문제 등 이웃 간 소통이 안 돼 생겨나는 갈등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아파트 내 분쟁과 주민의 고독감을 줄이기 위해 단지 내에 소통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우건설이 경기 화성시에 짓고 있는 아파트에는 주민들 간 화합을 돕는 공용공간이 마련된다. 주민들이 함께 요리를 배우고 노인들이 바둑교실을 열거나 영·유아 공동육아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곳이다. 2008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커뮤니티시설을 대규모로 아파트 단지 내에 구축한 GS건설 반포자이 아파트 또한 같은 고민의 결과물이다.
김억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는 “사생활에만 방점이 찍혀 있던 기존 도시건축(아파트)에 싫증을 느끼고 공동체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늘자 건축의 지향점이 서서히 공공성으로 넘어가고 있는 추세”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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