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 직원들도 모르는 ‘반쪽법’
法시행 20일째… 진상 고객 막말-욕설에 혼자 속앓이 여전
‘통화 중 208, 대기 중 63, 후처리 120.’
13일 오후 서울의 한 보험사 콜센터. 사무실 한쪽 벽에 걸린 대형 모니터 속 숫자가 상담 진행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했다.
13년째 고객 상담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A 씨(40·여)가 전화를 받고 인사를 하자마자 헤드셋 너머로 고성이 들렸다. A 씨 컴퓨터 화면 속 고객의 이름에는 노란색 표시가 떴다. 앞서 상담했던 직원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한 적이 있다는 ‘경고 신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고성으로 시작한 고객은 반말로 일관했다. 그때마다 A 씨의 손가락은 프로게이머가 무색할 만큼 계산기와 컴퓨터 키보드 위를 분주히 오가며 정보를 찾아내고 보험금을 계산했다. A 씨는 상담이 진행된 10분간 10번 넘게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이 ×”라는 말과 함께 전화는 끊어졌다. A 씨는 먼지가 잔뜩 낀 소형 선풍기를 켜고 찬물을 한 잔 벌컥 들이켰다.
“상담사들이 하루에 150통 정도 전화를 받아요. 그래도 이번 고객은 양반이에요. 성희롱을 하거나 ‘닭대가리 같은 ×’이라는 식의 욕설에 혼자 울어야 했던 적도 많아요. 우리 같은 사람을 보호하는 법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출입문에 붙어 있긴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지난달 30일부터 금융권의 ‘고객 응대 직원(감정 노동자)’ 보호를 의무화한 4개 금융업법(보험업법, 은행법, 자본시장법, 저축은행법) 개정안이 시행에 들어갔다. 개정안에 따르면 회사는 A 씨와 같은 상담사 등 감정 노동자에 대한 치료 및 상담을 지원하고 상시 고충처리기구 등을 설치해야 한다. 각 금융사는 “필요한 사항을 모두 마련했다”라고 밝혔지만 현장에서 직접 고객을 상대하고 있는 금융사 직원들은 “아직 갈 길이 멀다”라고 입을 모았다.
서울의 한 금융사에서 6개월 정도 고객 전화 상담을 주로 맡았던 B 씨(24·여)는 이달 초 회사를 관뒀다. 개정안이 시행됐지만 업무 환경이 근본적으로 나아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B 씨는 “직원 평가 지표에서 고객만족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높아지고 있어 부당한 요구에도 ‘죄송하다’는 말부터 하게 된다”라며 “임신 중 업무를 계속하면 스트레스 때문에 유산할 것 같아 퇴사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달 초 수도권에 있는 C은행 영업점 창구에선 임신 중인 여직원이 ‘진상 고객’과 상담하다 하혈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윤진하 연세대 의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팀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높은 수준의 감정 노동을 요구받는 근로자의 자살 충동은 그렇지 않은 근로자에 비해 남자가 2.07배, 여자가 1.97배 높다. 그만큼 이들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개정안에 명시된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지방의 한 은행 창구에서 근무하는 D 씨(34)는 “개정안에 따라 안내받은 사항도 없을뿐더러 11년간 근무하면서 한 번도 관련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금융회사의 적극적인 대처를 유도하는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박찬임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회사가 직원을 배려한다는 심리적 위안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욕설이나 성희롱을 하는 고객에 대해서는 회사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형사고발을 하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라고 말했다. 개정안을 지키지 않았을 때 금융사에 과태료(최대 1000만 원)를 부과하는 것만으로 변화를 유도하긴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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