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칼리 이온 정수기를 쓰는데, 흰색 가루가 나와 업체에 따졌더니 칼슘이 형성된 거라네요. 이거 안전한 걸까요?”
최근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정수기 민원이다. ‘내 아이에게 깨끗한 물을 먹이고 싶다’는 소망으로 고가의 정수기를 구매하거나 빌리는 가정이 늘면서 국내 정수기 시장은 2조2000억 원 규모(2016년 추정치)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정수기의 안전성에 대한 의구심도 커지고 있다. 최근 국내 정수기 대여 1위 업체인 코웨이 얼음정수기에서 니켈 성분이 검출된 데 이어 청호나이스 얼음정수기 제품에서도 금속 이물질이 나온 것으로 알려지면서 시민들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2014∼2016년 4월 국민신문고에 접수된 렌털 서비스 이용 관련 민원 512건 중 50.7%(254건)가 정수기에 관한 민원일 정도다. 우리 집 정수기, 얼마나 안전할까? ○ 140만 가구 ‘다기능’ 정수기 안전성 사각
국내 정수기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저수조 탱크를 두고 냉수, 온수를 만드는 정수기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물이 고이는 방식이어서 각종 세균 발생이 문제가 됐다. 대안으로 나온 것이 ‘직수형 정수기’. 직수형은 저수조 없이 바로 물을 정수하기 때문에 세균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평가 속에서 정수기 시장의 20%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직수형 정수기와 함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제품은 ‘다기능 정수기’다. 정수된 물과 함께, 부가 기능으로 얼음이 나오는 얼음 정수기, 탄산수가 나오는 스파클링 정수기, 커피가 나오는 커피 정수기, 미지근한 물이 나오는 유아용 정수기 등 다양한 제품이 쏟아지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약 140만 가구가 다기능 정수기를 사용하고 있다.
문제는 다기능 정수기가 ‘안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정부의 ‘정수기 품질 관리 과정’을 조사한 결과 정수된 물 외에 얼음, 탄산수, 커피 등에 대한 품질을 검증하는 과정 자체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정수기에 대한 인증과 검사가 환경부와 산업통상자원부로 이원화되면서 구멍이 생긴 것이다. 전기로 작동하는 정수기의 특성상 작동 안정성, 화재, 감전 등은 산자부가 담당하는 반면, 정수 기능 즉, 수질은 환경부가 검증한다. 현재 정수 냉온수의 수질 안전성만 검사될 뿐 정수기가 만드는 얼음, 탄산수 등은 몸에 해로운 물질이 들어가도 검증이 어렵다. 수돗물시민네트워크 김동근 사무국장은 “일반인은 당연히 정부가 부가 기능도 안전성 검사를 마쳤다고 생각한다. 두 부처가 서로 책임만 미루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 정수기 품질 검사는 정수기조합이 맡아
환경부는 “부처 간 논의를 거쳐 부가 기능으로 나오는 얼음 등에 대한 검증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취재팀이 개별 정수기 제품에 대한 품질 관리 결과 자료를 요청하자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답했다.
정수기 검증 제도의 구조적 문제 탓이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모든 정수기에는 ‘먹는 물 관리법’에 의거해 수질이 검증된 후 ‘국가통합인증마크(KC 마크)’가 부착된다. 정작 이 마크는 환경부의 위탁을 받은 ‘한국정수기공업협동조합’이 발행한다. 이 조합은 정수기 제조업체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만들어진 단체다. 즉 이익단체가 품질 검사 기관으로 지정돼 ‘셀프 인증’을 시행하는 셈이다.
일각에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시민환경연구소 백명수 부소장은 “검사가 부실하니 정수기에서 니켈이 나오지 않느냐. 조합은 한계에 다다랐다”라고 강조했다. 반면 환경부 관계자는 “조합 산하 정수기 품질심의위원회에 환경부 직원과 외부 전문가도 포함됐다. 실질적 검사도 연구기관인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과 한국환경수도연구원이 수행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업계에서조차 현재의 검사 시스템에서는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대형 정수기 업체 관계자는 “솔직히 비판받을 만하다. 전문가 등을 보강하고 객관성을 강화해야 한다”라고 귀띔했다. ○ 정수기 관리 일원화, 전문 검사 기관 육성해야
1995년 ‘먹는 물 관리법’이 제정되면서 정수기 관련 업무를 환경부가 담당하고 있다. 당시 정수기를 검증할 능력을 갖춘 기관은 조합뿐이었다. ‘먹는 물 관리법’ 43조 8항으로 조합이 검사기관으로 지정된 후 20여 년간 그 구조가 유지됐다.
이에 정수기 검증 시스템이 업계에 유리하게 이뤄져 왔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정수기 기준 규격 및 검사 기관 지정 고시’ 개정안이 올해 6월 시행되면서 용출 안전성 검사가 품질 검사 과정에 처음으로 포함됐다. 물이 정수기를 통과할 때, 접촉하는 부분에서 유해한 물질이 녹아 나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검사가 정수기 시장 규모가 2조 원이 된 후에야 이뤄진 것이다. 반면 고시의 개정으로 품질 검사 기간은 최대 105일에서 60일로 줄었다. 또 6월부터는 조합에서 정수기 품질 검사 정보망(www.kowpic.kr)을 통해 품질 검사에 합격한 제품의 정보를 게재해야 하지만 2016년 이전에 제작된 정수기들은 제외됐다.
전문가들은 △정수기 관리 체계 일원화 △정수기 품질 인증 기관 변경 △정수기 부가 기능 성능 검사 기준 설정 등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보건환경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은 “정부는 정수기 시장의 변화에 맞춰 검증 시스템을 철저히 보완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김윤종 zozo@donga.com·조건희 기자 박노명 인턴기자 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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