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된 백제 칠지도(七支刀)는 표면에 새겨진 명문처럼 생김새부터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보물이다.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자료로, 1874년 재발견 이래 100년 넘게 양국에서 집중적인 연구 대상이 됐다. 그러나 제작 시기와 목적, 양국 간 역학관계까지 많은 부분이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21일 열린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의 ‘칠지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국제학술회의에서는 한일 간의 시각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일 고대사 연구 권위자인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는 학술회의에서 “칠지도 연구에서는 백제가 일본에 대해 우위를 점하느냐가 핵심 쟁점 중 하나”라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 백제 왕세자가 칠지도를 왜왕에게 하사했느냐 아니면 진상했느냐는 논란이다. 이는 양국의 민족주의 감정과 결부돼 자국 중심 논리로 전개돼 왔다. 같은 명문을 놓고 한일 학자들의 해석이 엇갈리는 이유 중 하나다.
예컨대 칠지도의 제작연도를 밝힌 ‘태○4년 ○월 16일 병오(泰○四年○月十六日丙午·동그라미는 훼손으로 알아보기 힘든 부분)’ 명문을 놓고 일본 학계는 일본서기의 칠지도 진상 기록(신공기 52년)에 맞춰 ‘泰○’을 중국 동진의 연호(太和)로 간주한다. 백제가 독자 연호를 쓰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태화(太和) 4년은 근초고왕 재위 기간인 369년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369년으로 보면 명문 뒤쪽의 일간지(日干支)와 들어맞지 않게 된다. 그해 달력에서 16일 병오 간지의 일자가 없다는 얘기다. 일본 학자들도 이 점을 인지하고 여러 고서들을 뒤진 끝에 이른바 ‘길상구(吉祥句)설’을 들고 나왔다. 중국 한나라 왕충의 논형(論衡) 등에서 길한 날을 강조하려고 병오 간지가 아닌 날짜에도 병오로 표기한 사례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날 주제발표에 나선 기무라 마코토 일본 슈토대 명예교수는 “명문 날짜는 단순히 칠지도의 제작 날짜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몇 월 며칠까지 구체적으로 적시한 명문 형식을 볼 때 일간지를 맞추지 않은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4∼6세기 연대 중 16일이 병오 간지인 날짜를 찾아보면 칠지도 제작 시기는 369년이 아닌 전지왕 4년(408년)이 유력하다는 설이 한국 학계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 견해는 ‘泰○’을 백제의 독자 연호로 본다. 홍성화 건국대 교수는 “진서에 따르면 백제가 동진에 처음 사신을 보낸 시기는 372년 정월”이라며 “국교가 수립되기도 전에 백제왕이 칠지도에 동진 연호를 새겼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무령왕릉 지석 등 지금껏 발견된 백제 금석문에서 독자 연호가 보이지 않는 것은 한계라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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