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회장(81)을 7일 서울 종로구 우당(友堂)기념관에서 만났다. 김대중 정부 초대 국가정보원장이었던 그는 요즘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이 회장의 집안은 일제강점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 명문가로 꼽힌다. 그의 할아버지인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은 현재 가치로 600억 원 가까운 재산을 처분한 뒤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또 임시정부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지내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1869∼1953)이 작은할아버지다. 임시정부기념관은 상하이, 항저우, 충칭, 창사 등 중국에만 5곳이 있다. 그러나 국내에는 아직 임시정부를 기리는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는 실정이다. 이 회장은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내 서대문구의회 부지에 임정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
―임정기념관 추진의 경과는….
“2015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상하이 임정기념관 재개관식에 참석했을 때다. 김우전 전 광복회장(95)이 ‘서울에도 임정기념관이 세워지는 걸 보고 죽는 게 소원’이라는 뜻을 박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내가 당시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을 만나 이야기했더니 ‘좋은 계획’이라며 동의했다. 국회에서 2016년 예산에 임정기념관 건립 조사·설계비 명목으로 10억 원이 배정됐다. 그런데 이후 국가보훈처에서 공사 발주를 하지 않아 아무런 진척이 되지 않았다. 보훈처는 지난해 10억 원 예산 중에서 2000만 원만 쓰고 9억8000만 원을 그냥 반납하더라. 또다시 국회를 설득해 2017년 10억 원의 예산을 반영했다. 그랬더니 보훈처에서는 ‘민간에서 추진하면 예산만 지원하겠다’고 했다. 올해 2월 서울시가 서대문구의회 부지를 제공하겠다고 나섰지만 2019년까지 완공하려면 시간이 촉박하다.”
“서대문 독립공원에 임정기념관”
―서대문 독립공원에 임정기념관을 짓는 의미는….
“서대문 독립공원 내 형무소에는 연간 10만 명의 관람객이 온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받았던 형무소를 둘러본 관람객들은 대부분 울적한 마음만 갖고 돌아가게 된다. 여기에 임정기념관이 들어서게 되면 관람객들이 ‘아, 이런 정부를 만들기 위해 이렇게 투쟁했구나’ 하며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소중하게 키워 온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해보는 공간이 될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1919년 기미독립선언은 국내 정신사적으로는 왕정을 청산하고 민주공화제가 자리 잡은 사건이었다. 1910년 국권피탈 후 독립운동이 시작됐지만 당시만 해도 왕정을 복고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런데 1919년 고종 황제의 승하를 계기로 국민은 ‘왕정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민주공화제가 국민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3·1운동과 임시정부의 관계는….
“기미독립선언서는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을 선언하노라’라고 밝히고 있다. 독립국이라면 정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서울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됐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임시정부,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1919년 9월 각지의 임시정부가 상하이 임시정부로 완전히 통합됐다.”
―임정기념관을 세우는 원칙은….
“2015년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할 때 원칙을 정했다. ‘임시정부=김구’로만 생각하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임정은 더 큰 것이다. 이승만 안창호 여운형 이시영 이동녕까지 다 임정이다. 솔직하게 DJ(김대중 대통령)의 잘못은 백범기념관을 먼저 지은 것이다. 임정기념관을 먼저 짓고 백범기념관을 짓든지, 임정기념관 내 백범 기념홀을 만들었어야 했다. 임정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 박사 아닌가? 내가 이화장을 찾아가 이 박사의 양자인 이인수 씨를 만나서 함께하자고 말했다.”
이 회장은 요즘 “이승만과 백범을 화해시키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임정을 기념하고 복원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화해와 통일의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승만·김구 화해 추진”
―임정기념관 건립이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무엇이었나.
“건국절 논란의 여파가 컸다. 건국절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승만 전 대통령을 앞세우는데 정작 이 전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승만 박사는 건국은 1948년이 아니라 1919년 임시정부 건립 때라고 확언했다. 이 박사는 1948년 제헌국회 개회사에서 ‘우리 정부는 기미년(1919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民國) 임시정부를 29년 만에 부활시키는 것이며,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1948년 9월에 발행된 관보 1호에 ‘대한민국 30년’으로 썼다. 이 박사는 대통령 취임 선서, 국무총리 임명안, 대법원장 임명승인안 같은 정부 문서에도 1948년 대신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표기했다.”
이 회장은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 할아버지가 이 박사와 정면충돌하고 스스로 사임했기 때문에 우리 집안은 반(反)이승만적 분위기가 강했다”며 “그러나 알고 보니 국제법 박사였던 이 박사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굉장히 큰 포석을 해놨다”고 평가했다.
―임정기념관은 어떤 분들을 조명할 계획인가.
“임정 당시에는 분단이 없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 신익희 국회의장,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 안창호 여운형 이동녕 이시영 선생은 물론이고 납북당한 조소앙 선생, 월북했다가 숙청당한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선생까지 임정에 참여한 모든 분들을 포괄한다.”
―북한에서는 임시정부를 어떻게 보는가.
“북한에서는 1926년 김일성이 14세 때 만주에서 결성한 ‘타도 제국주의동맹’(ㅌ·ㄷ동맹)으로부터 사회주의 조선이 탄생했다고 본다. 김일성 이전의 어떤 독립운동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북한은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고 사설단체로 본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김용직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도 ‘임시정부는 민족운동 단체지, 정부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엄청난 항의를 받고 사과했지만 그런 인식 자체가 문제다.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의 적통을 잇는 대한민국이 북한처럼 1948년에 건국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종북 행위나 다름없다.”
―2020년에는 동아일보도 창간 100주년을 맞는다. 3·1운동과 임시정부, 동아일보 창간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민족언론도 3·1운동의 여파로 탄생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3·1운동과 관련해 체포된 민족지도자는 총 45인이었다. 훗날 동아일보 사장을 했던 고하(古下) 송진우를 비롯해 인촌 김성수가 설립한 중앙학교 사람들이 3·1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도쿄에서 2·8독립선언 후 밀사로 파견된 송계백이 서울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이었다. 이들은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 최남선 등과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3·1운동의 거사를 계획했다. 그런데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이름은 종교인(천도교 15명, 개신교 16명, 불교 2명)의 이름을 넣기로 했다. 종교인들은 탄압을 해도 아무래도 조금 덜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33인이 감옥에 들어가면 45인 중 남은 사람들이 2차로 독립운동을 계속 밀고 나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조사 결과 45인이 모두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동아는 독립운동의 국내 거점”
이 회장은 1936년 상하이에서 출생했다. 그는 임시정부 산하 인성학교에서 한글을 배웠다. 그는 “아버지는 동아일보를 안 보면 입맛이 없어서 밥을 못 먹을 정도였다”며 “아버지는 이승만 정권 이후에도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동아일보를 늘 보셨다”고 말했다.
―임시정부 관계자들의 동아일보에 대한 기억은….
“동아일보는 해외로 나간 독립운동가들의 개인사를 돕는 국내의 거점 역할을 했다.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작은할아버지가 임정에 계실 때 둘째 아들이 장가를 가게 됐다. 신부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신랑만 입국시켜 결혼을 시켰다. 당시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이 주례를 섰고, 동아일보에서 결혼 비용도 대주었다. 나중에 이시영 할아버지의 큰아들이 병을 얻어 귀국할 때도 동아일보에 편지를 썼다. 그 양반이 한문을 잘하니까 동아일보에서 교열부 기자로 취직시켜 주었다. ‘백범일지’에 보면 김구 선생의 모친도 1926년 상하이에서 귀국했을 때 고향 가는 여비가 떨어져 무작정 동아일보에 찾아갔는데 극진한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인촌 선생과 임시정부의 관계는….
“인촌 선생은 재산을 독립운동에 쓰신 분이다. 인촌이 임시정부 산하의 인성학교를 위해 자금을 지원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나도 인성학교에서 한글을 깨쳤다. 그러나 인촌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할 때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근거를 남기지 않고 신중히 진행했다. 그래서 그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회장은 현재 우당장학회뿐 아니라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도 맡고 있다. 7일 서울 종로구에서 열린 ‘봉오동 전투 전승 97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6일 현충일 기념식에서 “항일의 의병부터 광복군까지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의 신념이 태극기에 새겨져 있다”고 말한 구절이 무척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미 군정하 군사영어학교와 국방경비대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뒤 일어난 항일의병이 독립군이 됐고, 독립군이 광복군이 됐고, 광복군이 국군으로 이어져야 우리가 강한 군대가 될 수 있습니다. 임정에서부터 이어지는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해야 합니다.”
:: 이종찬은 :: △1936년 중국 상하이 출생 △육군 소령 예편 △제11∼14대 국회의원(4선) △국가정보원장(김대중 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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