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한트케(75)만큼 호불호가 엇갈리는 작가도 드물 것 같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설사 이해한다 하더라도 각각 해석을 달리한다. 평론가들도 그렇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산촌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지독히 가난해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고등학교를 다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보냈다. 이런 청소년기의 영향으로 그는 자신과 세계에 대해 부정적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제2도시인 그라츠에 있는 그라츠대에 와서야 그는 처음 전화도 걸고 당시에 유행하는 팝송과 영화도 접했다. 문학서클 활동을 하다 방송국을 소개받고 문화활동도 하게 되었다. 첫 소설 ‘말벌들’(1965년)이 활자화되자 법대 마지막 학기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한트케는 프란츠 카프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트케는 기존 질서를 개념화되고 고착화된 세계로 규정해 이를 허물고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 시도했다. 독자들에게 그의 작품은 난해하게 여겨졌다. 문단 데뷔 직후 당시 독일 작가들의 토론 집단인 ‘47그룹’을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초청했을 때, 출판사의 추천으로 참가한 한트케는 기존 작가들에게 맹비난을 퍼부었다. “문학이란 언어로 만들어진 것이지, 그 언어로 서술된 사물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며 기존의 문학적 가치와 방법을 강력히 거부했다. 당시 주류를 이루던 참여문학을 비롯해 어떤 이념에도 종속되기를 거부한 것. 같은 이유로 비평가들도 비난해 ‘47그룹’은 차츰 소멸하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한트케의 소설에서 카프카와 유사한 점을 발견한다. 그 스스로 “카프카는 나의 글쓰기에 한 문장마다 척도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카프카의 문학세계는 자아와 객관적인 외부세계가 너무나 큰 긴장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한트케는 언어의 주관성, 자아의 주체성을 추구하며 자아에 집중한다. ‘내가 보는 세계’만으로 그리는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은 일반 상식을 뛰어넘는 사고와 행동을 한다. 이를 보는 독자들은 혼란을 느낀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쓴다. 시에 미학적인 문구를 넣는 것은 구역질이 난다. 그것은 거짓이다. 현재 독일 문학은 서술이 없고, 창조와 성찰도 부족하다. 이런 산문은 무미건조하며 비평도 마찬가지다.”
한트케의 작품 가운데 비교적 스토리텔링 체계를 갖춘 것이 ‘페널티 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사진)과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정도다. 그가 ‘관객 모독’ 극본으로 전통 연극에 도전했듯이 소설에서도 ‘낯설게 하기’를 시도해 기존의 개념을 와해시키고 미래를 지배할 시적 사고의 힘으로 설득하려 한다. 주인공은 인습적인 언어를 거부하고 주관적 시각으로 대상을 해석함으로써 외부로부터 고립돼 의사소통 능력을 상실한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창의적이다” “정신병적이다” “독자가 더 이상 따라갈 수가 없다” 등 여러 평가가 나온다.
그는 수많은 상을 받았고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 카프카가 생전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듯이 한트케도 지금은 독자들이 거리감을 느끼지만 미래에는 또 한 사람의 카프카가 될 것이다.
김승옥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페터 한트케는…
오스트리아 그리펜에서 태어나 그라츠대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젊은 예술가들과 인연을 맺으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첫 소설 ‘말벌들’을 출간한 후 전업 작가가 됐다. 독일 문학을 거세게 비판하던 중 1966년 파격적인 희곡 ‘관객 모독’을 발표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소설, 희곡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논란을 몰고 다녔다. 전쟁과 가난으로 몸과 마음이 병들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머니를 보며 한 인간이 자아에 눈뜨는 과정을 그린 소설 ‘소망 없는 불행’은 실제 어머니가 자살한 후 쓴 작품이다. 영화감독 빔 벤더스와 함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1987년) 각본도 썼다. 독일어권의 주요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히너상을 역대 최연소(31세)로 수상했고 프란츠 카프카상, 실러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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