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배구 역사상 어떤 인물이 가장 사랑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배구 팬마다 생각이 다를 터. 하지만 ‘애증(愛憎)’을 합쳐 따지면 신치용 프로배구 남자부 삼성화재 단장(62·사진)이 1위라는 데 별 이견이 없을 겁니다. 삼성화재 관계자는 18일 “신 단장이 모기업 정기 인사에 따라 단장 자리를 내놓고 상임고문으로 발령받았다”고 전했습니다.
지난주 사석에서 신 단장과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이번 인사를 예견한 듯 “52년 만에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보통 회사원 정년을 감안하면 운 좋게 회사 생활을 오래했다. 일단은 배구 인생을 정리하고 싶다. 내가 배구 인생을 정리한다면 긴장하는 사람 많을 것”이라며 웃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배구 스타일을 가장 좋아하는지도 배구 팬마다 의견이 다를 터. 하지만 ‘애증’을 합치면 ‘몰방(沒放)배구’가 1위라는 데 별 이견이 없을 겁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몰방을 ‘총포나 기타 폭발물 따위를 한곳을 향하여 한꺼번에 쏘거나 터뜨림’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몰방 배구를 좋아하시나요? 삼성화재를 응원하시는 분들도 이 질문에 ‘네, 그렇습니다’하고 답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삼성화재 관계자도 저 표현을 썩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석에서 만난 한 삼성화재 관계자는 “쇼핑몰에 갔더니 행사 이름이 ‘몰빵데이’더라. 그 업체하고 MOU(양해각서)를 체결해야 하나 고민했다”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죠.
몰방 배구에 찬성하든 안하든 ‘신치용 식 몰방 배구’가 참 대단한 스타일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거든요. 남자 배구 경기에서 한 선수가 올린 점수 상위 톱10을 뽑아보면 59점부터 49점까지 나옵니다. 한 선수가 한 경기에서 49점 이상을 기록한 건 총 33번. 이 중 20번(60.6%)을 삼성화재 선수가 해냈습니다.
몰방 배구에 비판적인 이들은 그냥 한 선수에게만 공을 띄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폄하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숙적’ 현대캐피탈을 비롯해 사실상 한국 프로배구 팀 모두가 이 스타일을 따라했지만 2014~2015 시즌 OK저축은행 이전까지는 그 어떤 팀도 삼성화재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몰방 배구는 한국 배구가 꼭 넘어야 할 숙제 같은 존재였지만 그 누구도 쉽게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7시즌 연속 우승 가도를 달리던 삼성화재를 꺾은 OK저축은행 역시 외국인 선수 시몬(30·센터)을 중심으로 몰방 배구를 변형한 게 사실입니다. (전술적으로 조금 깊이 들어가면 OK저축은행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썼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몰방 배구가 아닌 스타일로 프로배구 V리그 챔피언에 오른 건 지난 시즌 현대캐피탈이 처음이었습니다. 현대캐피탈도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몰방 배구를 했다고 생각하는 팬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올해 챔프전에서 현대캐피탈 ‘에이스’ 문성민(31)은 공격 점유율 39.4%에 그쳤습니다. 그 전까지 12시즌 동안 챔프전 우승팀 에이스가 기록한 공격 점유율은 평균 49.5%였습니다.
재미있는 건 10년 만에 현대캐피탈에 우승을 안긴 최태웅 감독(41)이 좋든 싫든 현역 시절 삼성화재 주전 세터로 몰방 배구를 집대성한 주인공이었다는 것. 현대캐피탈이 몰방 배구와 정반대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스피드 배구’를 지향한 걸 조금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프리드리히 헤겔이 주장한 ‘정반합’의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구시대적인 몰방 배구가 배구 인기를 깎아 먹지 않았냐고요? ‘하드코어’ 배구 팬이라면 그렇게 느끼셔도 무리가 아닙니다. 다만 캐주얼 팬 인기 척도라고 할 수 있는 TV 시청률을 보면 사실과 조금 다릅니다. 특히 신 단장이 감독이던 시절에는 외국인 선수 공격 점유율이 올라갈수록, 그러니까 몰방 배구가 성행하면 성행할수록 TV 시청률 오르고 반대면 반대였습니다.
한국 배구가 몰방 배구로 치우쳤던 게 바람직했는지 물으신다면 ‘아니오’라고 답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몰방 배구가 아니라 그 스타일을 무너뜨리지 못한 다른 팀이 문제였습니다. 많은 배구 지도자가 몰방 배구를 무너뜨릴 해법을 찾기보다 그 스타일을 따라잡으려 애썼습니다. 그저 더 비싸고, 더 몰방에 적합한 선수만 데려오려고 했지 다른 해법을 찾으려 하지 않았죠. 그리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가 자기가 어머니와 동침하고 아버지를 죽였다는 걸 부인하면 할수록 정말 그랬다는 증거만 나오는 것처럼 한국 배구 역시 몰방 배구라는 비극에 빠졌던 겁니다.
그럴수록 ‘신치용 신화’는 더욱 굳건하게 한국 배구에 자리매김했습니다. 물론 신 단장 역시 자기 자리를 잃지 않으려 애쓰고 또 애썼습니다. 때로는 ‘독재’라는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자기부터 절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를 ‘습관’이라는 낱말로 표현했습니다. 신 단장은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고 우승해 본 선수들은 아니다. 그게 얼마나 짜릿한 경험인지를. 부임 초부터 힘든 훈련이 몸에 배게 했다. 지금은 선수들이 알아서 한다. 습관의 힘이 그렇게 무섭다”고 말했죠.
그래서 삼성화재에서 자기 팀 배구 스타일을 몰방 배구가 아니라 ‘시스템 배구’라고 불러달라는 건 무리한 요구가 아닐지 모릅니다. 외국인 공격수를 뒷받침하는 다른 선수들이 눈에 띄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절대 ‘삼성화재 왕조’를 만들지 못했으니까요. 이제는 삼성화재 코치가 된 고희진(37)은 현역 시절 “뭉쳐라, 팀워크는 모두를 춤추게 만든다. 버텨라, 기회는 오고 상대는 무너진다”라는 글을 자기 소셜네트워크(SNS) 자기소개로 쓰기도 했습니다.
프로배구에서 가장 사랑받는 팀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배구 팬마다 생각이 다를 터. 하지만 애증을 합치면 삼성화재가 1위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을 겁니다. 삼성화재에서 몰방 배구를 완성한, 아니 그 자신이 곧 몰방 배구와 동의어였던 신 단장의 ‘위대한 시절’이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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