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을 비롯해 눈이 부실 것 같은 진귀한 보물이 많은 나라”(일본서기·日本書紀), “부가 많고, 땅이 비옥하며 귀중한 보석이 지천에 많았다.”(이슬람 역사지리서 ‘황금초원과 보석광’)
천년왕국 신라와 교역했던 국가들의 문헌에는 화려한 신라의 모습이 이같이 기록돼 있다. 특히 경주 일대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고구려나 백제 유적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재가 있다. 바로 유리그릇이다. 장식이나 재질이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등 서역 문화의 특징을 지녀 고대 실크로드를 통해 신라로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돼 왔다. 그러나 구체적인 경로가 밝혀지지 않아 학계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최근 신라의 유리그릇과 중국, 몽골, 카자흐스탄 등 아시아 각 국가의 출토품을 분석해 고대 한반도까지 이어진 실크로드의 경로를 밝혀낸 연구가 나왔다.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가 쓴 ‘유리기로 본 동부유라시아 실크로드의 변천’ 논문이다. 박 교수는 20일 본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기존 신라의 실크로드 연구는 중국 중원의 실크로드를 경유한 사막로를 가정해 왔지만 실제 분석한 결과 시기별로 다양한 경로가 존재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 초원로 통해 실크로드와 연결
신라의 고분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경주의 황남대총. 5세기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분의 대표적인 유물 중 하나는 그물무늬 유리잔이다. 투명한 유리 재질의 전형적인 로만글라스(Roman glass·로마와 속주에서 제작된 유리그릇)의 모습이지만 당시 한반도에는 유리 제조 기술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유리잔은 어떻게 신라까지 흘러왔을까.
실마리는 중앙아시아에서 찾을 수 있다. 카자흐스탄 카라아가치 지역에서 출토된 유리잔을 보면 담녹색 빛깔에 3줄의 유리띠로 장식한 문양까지, 밑받침 부분을 제외하고 똑같은 모습이다. 이 같은 유리잔은 중국 실크로드의 중심지인 장안(長安·현 시안)에서 떨어진 동북부 지역의 랴오닝성 베이퍄오시에서도 5점이 발견됐다. 반면 같은 시기 중국 중원의 황제와 귀족묘에서는 이 같은 유리그릇을 부장한 예가 없다.
박 교수는 “중국 중원을 통하지 않고, 북방 초원로인 카자흐스탄과 몽골초원을 지나 만주를 거쳐 경주까지 전해진 것”이라며 “북연∼고구려∼신라로 이어지는 동부 유라시아의 실크로드를 통해 신라가 독자적으로 서역 문화를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 초원에서 사막으로, 다시 바다로
신라는 국제 정세에 따라 다양한 실크로드를 운영한 것으로 밝혀졌다. 6세기 들어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한 신라는 중국과 활발하게 직접 교역했다. 초원로를 거치지 않고, 사막로를 통해 서역과 교류하면서 당시 유행했던 사산조 페르시아 양식의 유리그릇을 받아들였다.
통일신라 시기였던 9세기 이후엔 장보고 등 해상세력이 주도한 사(私)무역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부턴 이집트 등지에서 만들어진 이슬람글라스가 유행했는데, 경주 안압지와 사천왕사 등에서 출토된 바 있다. 베트남의 꾸라오짬 유적지와 중국 남부 광저우시의 남한(南漢·909∼971) 황제묘에서도 이슬람 유리그릇이 발견돼 해로를 통한 실크로드가 활발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 교수는 “신라는 시기별로 초원과 사막, 바다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끊임없이 서양과 교류한 글로벌 제국이었다”며 “한국 고대사 역시 실크로드와 뗄 수 없다는 점에서 관련 연구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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